세상읽기
이규홍 <새진안포럼·주천면 무릉리>

책 한 권을 읽는데 무려 보름 남짓이 걸렸다. 읽다가 덮고 한참을 생각하고, 또 읽다가 덮고 한참을 분노하고. 많이 불편했다. 마음이.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려야 하는가? 유엔 특별 식량조사관을 지낸 장 지글러가 탐욕의 시대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책의 제목도 그래서 탐욕의 시대다. (탐욕의 시대, 장 지글러 지음, 갈라파고스출판사)

21세기, 한 점의 부끄러움도, 의혹도 없을 것 같은 민주주의의 시대에 등장한 신흥 봉건 제후들의 물불 안 가리는 탐욕에 대해선 누구나 알고 있다. 신흥 봉건 제후들이란 누구인가? 국가를 초월하는 힘과 자본을 가진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과 금융 자본가들, 곧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 국가란 자신들의 힘과 자본을 팽창시키는데 필요한 도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 역시 이들을 제왕으로 떠받들며 제왕의 눈치 보기에 급급할 뿐 인권이나 양심 따위의 가치에는 관심도 없다. 그저 시늉만 할 뿐이다. 정치권력은 아침이슬과 같지만 돈의 권력은 영원하다. 국가가 자본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성스런 개가 되는 이유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개뼉다구같은 말은 필시 나라님 이하 그 둘레에서 배 두드리며 함께 부를 누리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말이 분명하다. 지금도 기아는 하루하루 대규모의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전쟁도 기아로 인한 죽음만큼 사람을 끔찍하게, 그리고 많이 죽이진 못한다. 5초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굶어죽고, 비타민 A의 부족으로 4분에 한 명이 시력을 잃는다고 한다.

현재 세계의 농업 생산력으로 120억 명을 정상적으로 먹일 수 있다고 한다. 어른 한 명당 하루에 2,700칼로리의 영양섭취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걸까? 현재 지구의 인구는 62억 명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사람이 먹어야 할 농산물을 소에게 먹이거나 자동차 연료로 쓰고는 지구적인 식량난을 대비해 유전자를 조작한 농산물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자들은 또 누구인가? 주로 북반구에 자리 잡은 신흥 봉건 제후들이 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약소국과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옭아매 노예나 다름없이 부리며 착취할 수 있는 구실은 가난한 나라들이 지고 있는 빚 때문이다.

일러 국가부채. 봉건시대에 지주나 양반들이 가난한 백성들에게 장리쌀을 놓고 빚을 못 갚으면 노예로 삼던 방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 기술은 더욱 교묘해졌고 합법적이 되었을 뿐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부자들에게는 껌 값밖에 안 되는 부채 때문에 그 빚을 갚느라 자기 나라의 국민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고 가르치지 못한다.

악순환이다. 빚은 점점 늘어만 간다. 1980년대에 580억 달러였던 122개 가난한 나라들의 부채는 20년 동안 2,4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외채의 상환을 중단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한 가난한 나라는 계속 가난해야 하고 여전히 5초에 한 명씩 어린이가 굶어죽어야 한다.

아주 놀랍지만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사실 하나,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의 빚을 아무 조건 없이 몽땅 탕감해 주더라도 채권국인 산업사회 국가들의 경제와 그 국민들의 복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

(2000~2002년 사이, 제3세계가 진 빚의 70배에 달하는 주식의 손실을 보고도 증권거래에 나섰던 부자들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럼 빚을 탕감해주고 함께 잘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상에 그런 낭만적인 부자는 없다. 빚을 탕감해 주고나면 그 집 어린 딸을 데려올 수 없으니 말이다.

가난은, 기아는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기아로 죽은 어린아이는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과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한 정치인과 지식인나부랭이들(주로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편성된 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질서를 정당한 게임이라고 하며 자신들이 저지르는 살인을 그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그저 막연하게 경쟁의 논리라고만 이해하면 안 된다. 신자유주의는 명백한 살인의 법칙이다.
강자가 약자를, 강대국이 약소국을 힘닿는 데까지 죽여도 좋다는 살인의 법칙. 그냥 선의의 경쟁이라고 오해하면 큰일 난다.

미국과의 FTA에 이어 유럽연합과도 거의 거래가 마무리되어가는 모양이다. 나는 정치적인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최고의 잣대를 신자유주의와 FTA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간단하게 정리하고 싶다. 사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가 등장할 때면 종종 총, 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다닌다. 온정의 논리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식품과 관련된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 곳곳에서 저지르는 야만적인 약탈행위를 대충이라도 살펴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리라.

재수가 좋아 우리는 조금 먹고살만한 나라에 태어났다. 그래서 밥은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뿐이다. 만약 운이 나빠 에티오피아나 브라질의 빈민가 어디쯤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그들의 비참한 삶이 곧 나의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장 지글러는 이것을 '출생의 우연'이라고 했다.) 이런 탐욕의 시대를 끝장내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일이다.

내가 농민과 노동자라면 FTA를 반대하는 일에도 참여해야하고 내가 자연에 깃들어 사는 연약한 존재임을 안다면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도 앞장을 서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그보다 먼저 마음속에 자리 잡은 도덕과 수치심을 일깨워야겠다. 출생의 우연에 불과한 나의 행복에 겨워할 것이 아니라(기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타인과 약자에 대해, 그리고 불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감수성을 기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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