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86 진안읍 가림리4 선인마을

▲ 쪽진 비녀를 매만지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변남녀 '할매'
이장님은 작은 산을 넘어 수박 모종을 심고 있다. "(찾아)올 수 있을랑가." 마을은 별나게 숨었다. 원가림을 지나 오른쪽 산모롱이를 넘자 앞은 숲뿐이다. 녹슬지 않은 산. 태곳적 비밀을 품은 산이다. 갑자기 산이 쓸리는 느낌. 마을은 산 아래 오막하게 자리 잡았다. 어, 저건 뭐지? 왼편으로 커다란 딱정벌레처럼 벼랑 위에 매달린 꼴이라니.
 
몸이 잠든 할배
흙집. 노랑 벽. 이 집은 마치 선인마을에서 혼자 튕겨 나온 부유물 같다. 큰비 한 번 쏟아지면 와장창 무너질 수도 있을 텐데. 마치 으름장을 놓으며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쪽 진 비녀를 매만지는 집주인은 꼬부랑 기역자도 모른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허구헌날 '질쌈(길쌈)'질만 했다. 일 년에 몇 번 장터에나 나가볼까.

조지 오웰이 쓴 <파리와 런던의 뒷골목>에선 노숙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비오는 날엔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싸구려 여관집에 틀어박혀 빈둥대는 노숙자 둘. 한 명은 글자를 읽지 못해 울기만 한다. 무료함 때문이다. 책도 읽을 수도 없으니, '할매'는 얼마나 심심했을꼬. 영감님은 몸져누웠다. 몸은 잠들고 눈만 살아 허공을 쳐다본다. 매달 정부에서 받는 30만원이 노부부 수입의 전부. 20킬로 쌀값을 빼면 먹고 사느라 복장 터질 일이다.
 
하늘담은 저수지
마을 입구. 앞 날망(고개)을 넘으면 백운이란다. 그 길이 나다말았다. 공사가 중단돼 발전이 안 된다는 것이 유영옥 씨(55)의 주장이다. 발전. 댐은 주민을 내쫓고 도로는 산을, 수많은 생명의 몸을 뚫었다. 이런 게 발전이라면 그만하자. 돈 걱정 없이 마음 편한 거. 그걸 말하는 거겠지.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농사가 대를 이었다. 고생도 대물림했다. 고향이, 빈곤이 너무 낯익어 애정도 사라졌다.

사철나무로 둘러싼 집을 만났다. 주홍빛 지붕. 작은 녹빛 텃밭과 화단. 이런 집에 살면 나도 '정물'이 될까. 부럽다. 외양간이 군데군데 집들 사이에 박혀 있다. 마을을 지난다. 구불구불 산길을 걷자 녹음이 우거진 산 속에 하늘을 담은 저수지가 나온다. 바람이 불어 저수지 표면에는 물주름이 인다. 물의 나이를 알 수 있을까. 하루 온종일 한가하게 이곳에 앉아 있어도 좋을 것 같다.
 

▲ "선인마을은 신선이 살았던 동네요" 마을을 소개하는 김영용 이장.
가뭄에 고생도
김영용 이장(55)이 품앗이 나온 아낙들과 함께 땡볕 아래 쉬고 있다. 마침 새참을 먹으려던 참이다. 고봉밥을 준다. 취나물을 데쳐 된장에 무치고, 산에서 따온 고사리를 말려 조기와 함께 '지졌'다. 양푼에 담긴 짭쪼롬한 국물 맛에 따가운 햇살도 잊었다.

"선인 마을은 신선이 놀고 갔다고 해서 '선인'이요. 저수지 봤소? 거짓이 아니지. 착한 사람이란 뜻도 있어요. 그냥저냥 먹고 살아도 주민들이 참 순박해요. 좋은 사람들이지."

김 이장은 팔을 비스듬히 대고 앉아 먼 산을 보며 말했다. "날이 가물어 작년에 죽을 뻔 했어요. 상수도를 깔았는데 수도 연결이 잘 안 됐는지 뭔지, 왜 글케 물이 안 나와. 30년 넘게 낡은 간이상수도를 쓰고 있는데, 힘들었지. 아주."

아낙들 중 한 명이 입을 뗀다. 부녀회장 김명자 씨(58). "예전엔 우물이 있었는디 그 짝에서 퍼다 썼어. 시한(겨울)에도 물이 참 따쉈어. 참 깨깟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낙도 한 마디 거든다. "시집을 가라고 하는디, 선인 마을이랴. 누가 옆에서 그려. 그 동네는 가자마자 발꼬락이 굽는댜. 3년 뒤에나 발꼬락이 펴진다고."
 
미끌미끌 진흙길에
갑자기 모두들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웃는다.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발꼬락? 멀쩡한 발가락이 왜 굽을까? "그런갑다 하고 시집을 왔어. 오매! 질(길)이 난리도 아녀! 미끌미끌 진흙길여. 나도 안 자빠질라고 발꼬락에 힘주고 다녔고만. 옆집 사람은 물동이도 깨더라고."

머리에 물동이 인 새댁들에게 마을 총각들은 돌을 던졌다. 물론 일부러 맞히지는 않았다. 사람에게 향하는 호기심. 그 호기심이 모여 지금의 마을을 이루는 것일 게다. 지금이야 길 위를 뛰어다녀도 좋다. 이장이 지름길을 알려준다. 뒤돌아가는 길엔 아카시아 그늘이 드리워졌다. 산바람이 시원하다.

▲ 마을 주민 유영옥씨. 낯익은 것들은 더러 무관심의 대상이다. 고향에 애정이 없다는 그.

▲ 신나는 점심시간. 고봉밥에 '쪼린' 조기반찬, 최고!

▲ 선인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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