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88 백운면 백암리 번암마을

▲ 번암마을 전경
지구가 한증막을 개업했다. 후끈 달아오르는 날. 도로 위에 껌처럼 달라붙을 타이어 걱정에 그늘부터 찾았다. 마땅한 장소가 나타나지 않아 별 수 없이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웠다.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는 몇 초 사이에도 '양철자동차'는 온몸으로 열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뒤짝으로 와요."
차분한 이장님과 달리 나는 개처럼 헐떡였다.
 
▲ 마을유래를 설명하는 양기준 이장
추운 산골의 밤
시쳇말로 작업 들어갔다. 총각 도선씨는 참한 처녀 분옥씨에게 반했다. 이것저것 재지도 않고 그냥저냥 혼례를 올렸다. "선인마을에서 시집와 살았는디, 냉해가 든 거여. 아이고, 곡식이 다 말라 죽었네. 먹고 살 길이 없어 석 돈짜리 결혼반지를 팔았어."

안분옥씨(51)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못내 서운하다. '맴이 짠'한 순간이다. 양기준 이장(61)이 며칠 전 비가 왔는데 오늘 아침에 고추밭을 가보니, 고놈들이 시들시들하다는 거다. 서리가 내렸다. 산골의 밤은 추웠다.

그 말을 듣던 옥분씨가 말 나온 김에 어려웠던 한때를 기억한다. 아침에 그이는 노인을 수발들고, 낮에는 농작물을 돌본다. 농부이자 요양보호사. 돌봄을 받는 의미에서 노인과 곡식은 같다. 농촌에 사는 여자의 일생. 옥분씨의 뒷바라지는 언제쯤이나 끝날까.
 
캐고 또 캐도 바위만
거실 창문 밖으로 호밀밭이 바람에 쏴 엎어진다. 소여물로 쑬 호밀이다. '까끄런' 털 안으로 알맹이가 통통하게 살찌는 계절. 옆 집 돌담에는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담쟁이 줄기가 뿔 달린 달팽이처럼 벽을 기어오른다.

엊그제 비가 개어 산이, 호밀밭이, 담쟁이 넝쿨이, 하늘이 다 푸르다. 번암 마을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살지만 자연을 잊고 산다. 자연은 가끔 투쟁의 대상이 된다. 가뭄과 홍수 그리고 냉해와 날벌레. 땅뙈기 한 평 없는 이방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건만 말이다.

"점심 자시고 가셔." 양 이장이 권하자 그이의 아내는 부엌에서 혼자 달그락거린다.
분옥씨가 달려가 점심 차리는 걸 도왔다. 한평생 부엌에서 물질로 고달팠던 아낙들이다. 새마을 지도자 김종환(49)씨까지 남자 셋이서 낮술을 마시는 참. 1.5리터짜리 맑은 소주가 몇 잔 돌자 바닥을 보인다. "캐고 또 캐도 바위만 나와. 그래서 번암여."

새마을 운동 때 초가집을 뜯어 빈대를 잡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을 때였다. 마을에 길을 내려 땅을 파도 드러나는 건 온통 바위. 바위땅이었다. 트럭으로 몇 날 며칠을 떠메 가도 돌은 계속해서 덩어리를 보였다.
 

▲ 자전거 체인 이정표.

공무원·교사 세 들어, 한 때 100채
번암. 양기준 이장의 말에 따르면 번암의 다른 이름은 '번바우'로 지명의 유래는 크게 2가지란다. 하나는 마을에 큰 돌이 많아서 '번바우'로 불렸다.

<백운>소식지에는 정자나무 아래에 평평한 바위가 있어서 '번바우'라고 불렸다고 한다. 정자나무 아래에 박혀있는 돌의 이름이 '너번바우'다. 화강암 덩어리 위에 마을이 세워졌다. 양 이장이 번암마을에 이사 왔을 때도 100채가 넘는 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백운면사무소가 코앞인 마을이라 공무원들이 많이 살았다. 당시엔 교통이 좋지 않아 자취하는 젊은 교사나 면사무소 공무원들이 태반이었다. 집집마다 셋방을 살았다.

주말만 되면 집에 가느라 정신없이 짐을 꾸렸다. 백운시장은 진안에서 제법 큰 5일장이었다. 소시장이 서고, 함께 손잡고 간 사람을 잃어버릴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60년대에는 백운에만 만 명이 넘게 살았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유명했던 번암 농악소리
오던 길에 마주쳤던 간판에는 '담쟁이 길'이란 글자가 또렷이 씌어있었다. 정작 사람이 보이지 않는 동네다. 두런거리는 사람 소리 대신 씩씩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앞에 시내가 흐른다. 백운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다리를 놨는데, 잠수교다. 여름이면 비가 쏟아져 다리가 물에 잠기곤 하나보다. 맞은편 산은 밥공기를 엎어놓은 모양새다. 녹색 사기그릇에 새겨진 흰 꽃처럼 소박하게 핀 꽃송이가 조롱조롱 맺혔다. 찔레꽃.

▲ 번암마을 모정

번암마을에는 25가구에 60명이 산다. 이주여성과 아기까지 합해서다. 어딘들 마찬가지겠지만 번암마을도 요즘 이웃 보기 힘들어졌다. 바쁘다.

똥이나 뀌던 사람이 자식을 대학 보내던 때도 있었지만 자식들 등록금 대기도 버거운 현실이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밭에서 땅을 헤집는 통에 '품앗이'란 말도 옛말이 됐다.

집에 들어가면 곯아떨어지고, 텔레비전만 어두운 방에서 혼자 까분다. 겨울에야 회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마을에는 풍물 소리가 잠잠하다. 청년들이 대보름날에 장구와 꽹과리를 치며 집집마다 돌았던 흥겨움은 초여름 땡볕에 잠시 풀이 죽었다.

유명했다던 번암의 농악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기대는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약속이다. 다시 올 거라는.

 

▲ 담쟁이길. 실지로 담쟁이덩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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