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남편과 아들 수발했던 용담 방화마을 강순정 할머니

▲ 한글공부에 여념이 없는 강순정 할머니

여자 나이 아흔 둘. 인생의 황혼기. 스스로 자신을 돌보며 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회복을 소원한다. 하체가 마비된 아들.

삶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것에 충실해 보이는 순정씨. 열정을 통해 진실하고 강렬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고비가 서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이제 고쳐야 한다. 한평생 남편과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외면했던 그이가 삶을 뒤집는 순간. 순정씨는 자신의 삶에 독립선언을 하고 있다.

목요일과 금요일은 학교 가는 날. 학교가 아니라 주민자치센터에 등교(!)하는 날이다.

순정 씨는 책가방을 짊어진 채 지팡이를 짚고 방화마을을 나선다. 초여름이 다가오는 길은 벌써 뜨겁게 달구어졌지만 순정 씨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릎이 아파 계단이 버거울 만도 하건만 그이는 개의치 않고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을 뗀다. 교실에는 벌써 많은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수업을 기다린다.

받아쓰기 시간. 시험은 아니지만 돋보기 너머로 연필을 꾹꾹 눌러 글자를 쓰는 백발노인들. 그들이 순정 씨와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는 용담면 은빛 문해반 학생들이다.

'고래', '노루','노래'. 순정 씨는 큼지막한 글씨를 쓰고, 숫자 9에 색칠을 한다. 작달막한 키에 주먹만 한 얼굴, 굽은 허리 때문에 책상에 엎드리면 회색 머리만 보인다.

분홍색 색연필로 열심히 색칠을 하고, 또 선생님 말에 귀를 쫑긋 세운다. 잘 들리지 않는 귀. 가는귀를 먹은 그이가 선생님의 표정과 얼굴에 열심히 주목하는 이유다. 선생님은 순정 씨 주변을 항상 맴돌며 그이가 어려움이 없도록 보살핀다.

"선상님이 으찌나 잘 해주덩가. 글자 배우는 건 운동여. 집에서 왔다갔다, 글자 쓴다고 팔도 놀리고. 총기가 없어 글자를 못 배워 넘부꾸라(창피해) 죽겄어." 그이는 글자를 안 뒤 기분이 좋단다. 19살 때 방화마을로 시집와 아들 둘을 낳고 살았다. 남편은 젊은 나이에 풍을 맞았다. 수발은 6년간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신작로를 넓힌다고 고된 노역을 했다. 무거운 돌멩이를 허리가 부러져라 걷어냈다. 저녁에 오면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똥오줌을 다 받아냈다.

남편이 죽고, 장성한 아들만 바라보고 벼농사를 지으며 옹기종기 살아가던 어느 날. 그이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들이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것. 억장이 무너졌다. 

"동네에서 나만 놀아." 마치 노는 것이 부끄러움이라도 되는 냥, 그이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올해에는 며느리가 검은쌀(흑미)을 심었다. 남편 수발에, 시어머니 봉양에 절로 늙는 며느리. 자신을 금쪽 같이 안단다. 자랑이 대단하다.

"우리 메누리가 최고지." 한글 교실에 다니면서 그의 얼굴에서 서러움이 조금은 걷힌 듯하다. 하루 종일 밝고 씩씩한 우리의 순정 씨. 종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그이는 말한다. "하나님이 날 천국에 보내준대, 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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