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89 동향면 성산리 섬계마을

▲ 마을 유래에 관해 설명하는 박성호씨.

"구량천 물길이 흐르다 동네를 감싸 안고 마을 언저리에서 쉬어가는 폼이요."

박성호(47)씨가 마을에 관해 운을 뗐다. 그의 등 뒤로 구량천 물길이 거세게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물빛은 연녹색이었다. 접칼로 고구마를 아무렇게나 깎아놓은 듯 길쭉하게 서 있는 기암괴석.

그 단단한 바위 속으로 뿌리를 박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마을을 마주하고 있었다. 몸살을 앓듯 송화가루를 온몸으로 털어내던 나무들. 치열한 삶은 이 적막한 마을에도 예외는 아니다.
 
동네 뒷산 넓적바위에 백설기
박씨는 수박 모종을 따던 참이었다. 마을 유래에 관해 말을 늘어놓는 그의 얼굴이 나무 그늘 때문에 더 가무잡잡하다. 박 씨는 설명한다. "섬계마을은 '섬티'라는 마을이름으로 출발했어요. 마을 앞으로 물이 굽어 돌아 흘러 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예요."

물 흐르는 중간 지점에 놓인 마을. 섬 같이 생겼다고 해서 '섬계'. 섬티의 행정리명이 섬계다. 마을은 천반산을 등에 품었다. 천반산은 동향면 성산리와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소반처럼 생겼다고 해서 천반산. 조선시대에 정여립이 은신한 곳이라고 한다. 섬계마을은 밀양 박씨가 형성한 마을이다. 이천아 이장을 제외하고 만난 이는 모두 박씨였다.

"산신제요? 몰라. 암튼 동네 뒷산에 넓적한 바위가 있어요. 정월 초사흗날에 백설기를 한무데기 시루에 쪄 동네 바위에 얹어서 기원을 들였어요."

동네 사람들은 쌀을 걷어 떡을 찌고 바위 둘레에 금줄을 쳤다. 명태와 과일도 얹고, 마른 북어와 술 한 잔도 곁들였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기원을 드렸다. 기원을 하기 전 냇물에 온 몸을 씻었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운 겨울에 멱을 감았다.

글자깨나 읽는 사람이 축문을 읽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그 옆에 서서 축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절을 한다. 축문을 읽은 사람은 사흘 동안 동네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를 본 사람은 부정을 탄다는 것이다. 대개의 동네 사람들은 삼일 내내 집 안에서 궁싯거렸다.
 

▲ 여성 이장 이춘아씨.

38살, 여성 이장 이춘아
성호 씨 옆에 있던 박순봉(57)씨는 어린 시절, 초가집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아작아작 따먹었다.

나무썰매를 가져와 얼음을 지치고, 여름에는 물가에서 물고기를 낚았다. 흐르는 냇물에 입만 대면 목구멍 속으로 술술 들어와 내장을 식혔다.

바닥에 자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이 예전만 못 하다."라고 말한다.

현재 섬계마을 냇물은 2급수.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박씨네 수박밭 옆에 있는 골짜기가 먹자골. "으른들이 거기서 많이 먹고 놀아서 그렁가. 먹자골이란 게 말여."

순봉 씨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순봉 씨 옆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가 이상하다. 이장이란다. 남존여비의 관행이 조금은 남아있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일. "이장? 그냥 됐어요."

익산 삼기에서 시집온 이춘아 (38)씨. 신랑 박성호 씨보다 좋은 사람은 없단다. 그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간벽두까지 따라 왔다. 얼기설기 지은 집.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을 때고, 물질을 시작했다. 몸이 고단했다. 수박, 고추농사가 힘들다.

익산 삼기는 고구마로 유명하다. 옆에 앉아 있던 성호 씨가 "고구마 캐기 싫어 날 따라왔다네요."라고 놀린다.

▲ 고향을 등진 사람들. 그러나 고향은 언제나 그들을 데려온다.
"고향이 땡기거든"
섬계 뒤쪽으로 '열두 모랭이'를 넘어야 장수를 갈 수 있었다. 섬계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붉고 노란 가을 단풍의 화려함에 놀라고, 포근하게 눈이 덮인 설경에 두 번 놀란다. 앞쪽 재 너머에는 모반사건으로 정여립이 죽었다는 '성터'가 있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마을로 내려왔다. 군데군데 민박집이 들어찼다. 마을까지 가는 길에 벚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초여름인데도 불볕더위가 찾아오고 있는 참이다. 중간에서 굴삭기가 먼지를 날리고 있다. 헛간을 부순다. 낡은 것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흙벽 대신 벽돌이 들어서고, 현지인 대신 외지인이 명맥을 이어간다. 12가구 20명이 사는 동네. 노랑파랑 붓꽃이 핀 화단 앞에 노인 둘이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다. "자식들 교육 때문에 논을 팔고 전주로 나갔어. 가끔 와. 고향이 땡기거든."

고향은 핏줄 같은 것인가. 박정훈(80)씨는 섬계를 떠난 뒤 장사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려고 해도 몇 십리 길을 걸어야 했던 마을. 지금이야 하루에 두 대씩이지만 버스가 들어온다. "전셋집이라도 읃을라면 농토를 팔아야 했어. 어쩔 수 없었지. 지금 다시 와 보니까 좋구만." 함께 동행 했던 친구 박씨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 고향을 등진 사람들. 그러나 고향은 언제나 그들을 데려온다.
흰 모시적삼. 소풍이라도 나온 차림이다. 기억을 건지기 위해 그들은 마을 이곳저곳을 고고학자처럼 걷는다. "예전엔 호롱불 키고 살았는데, 참 많이 변했어. 산신바위? 저짝 벙벙한 바위 쪽으로 가 봐요."
그들을 뒤로 하고, 산길을 오른다. 새로 지은 듯 화려한 유럽풍 주택들이 산 위에 으름장을 놓듯 버티고 서 있다. 중간쯤 오르자 굴이 나타난다. 굴 앞으로 '벙벙한' 바위가 놓여 있다. 산신바위. 고동 껍데기처럼 굴 입구는 안으로 말렸다. 마을 꼭대기에 서자 적막감뿐이다. 어쩐 일인지 춤이라도 추고 싶다. 산신이 나를 희롱하는구나. 이러다 작두라도 탈까 싶어 후다닥 내려왔다.

 

 

 

 

 

 

▲ 천반산 자락에 아늑히 잠긴 섬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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