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육 최양 선생과 최씨 고집의 유래

*만육 최양 선생은 이성계와 친한 사이로, 태조가 조선을 세우고 등극한 뒤 그를 여러차례 등용하려 했으나 고려에 대한 충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벼슬을 나아가지 않았다. 최씨 고집이란 말은 바로 만육 최양 선생의 고집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최(崔)자 양(瀁)자 할아버지거든요? 만육(晩六) 할아버지가? 그 양반하고 동문수학하고 고려서부터 같이 해서 있다가 우리 할아버지는 이성계, 이태조가 등극을 한 뒤에 우리 할아버지는 충신은 불사이군이라구 해 각구 우리 할아버지는 두 임금은 안 땡긴다고 해 가지고 백운면 반송리 고 우에 신암리라고 하는데 가서 우리 할아버지가 피신을 하고 있었어요. 이씨 그 조정에 가서 벼슬 안 한다고 나와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인제 ‘금강록’ 책에 다 나오고 하는데 이성계가 하~도 불러서 안 가고 안 하고 하닥 나중에는 신하들이 역적으로 몰아서 거식한다고, 그런게 이성계가 “그건 둘도 없는 내 죽마고운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해 가지고 직접 그 이성계 그 임금이 직접 찾아보러 내려온다고 통지를 헌게 아 그때.“임금이 내려오겄냐?”고 “내가 올라간다고” 해 갖고 우리 할아버지가 인제 가서 그 이성계를 만내 보고, 이성계가 “나와서 벼슬 좀 해서 같이 히서 나라를 다스리게 조언을 해 돌라”고 거시강래로,“충신은 불사이군이라”고“절대 그럴 수가 없다”고“그냥 조용히 시골 가서 살겄다”고 헝개로 “그러면 정 그러면 어쩔 수 있냐?”고함선 저 전주, 전주 그 소양 가서 사방 십 리, 사방 십 리 내려주지 않앴어요? 그래서 시방 우리 할아버지가 시방 소양 고 안에 고대성동이라고 있거든요? 대성동 가서 붙이 갖고 있었지마는, 시방 그런 유래가 시방, 이씨조선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최가들 더러 그 고집이 세다고 하는 유래가 거기서 나온 거요. 최고집 최고집 하는 것이 지금 사람들이 머 그 고집이 세서가 아니라, 전에 그 우리 만육 할아버지.시조 만육 할아버지가 고집을 부리고 그렇게 그 이성계 조정에 가서 벼슬을 않고 거식핵기 때문에. 인제 후손들한테 최고집하고 이름 붙인 것이 거그서 유래가 된 거예요. 그게.<2003. 8. 14. 백운면 동창리 석전 모정. 최명철(남·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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