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안성현씨
안성현 씨
상전면 구룡리 세동마을 출신
한국요양보호사협회 대표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 가수
영정사진 무료촬영나눔회 회장
국민대 정치대학원 총원우회 회장
새진안발전지방자치포럼 회장

1997년 그가 10여년간의 군 생활을 청산하고 육군소령으로 예편하면서(그는 청주대학교 4년간 국방장학생으로 육군학사장교 제8기 출신이다.)노래에 전념하겠다 하는 그 일념 하나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일성으로 <벽속의 남자>를 선 보인다.

하늘만 바라보고 기린처럼 살았는데/첫 단추 잘못 끼운 그 상처 너무 깊어/선비 같은 외 길 인생/돌아보면서 소리 없이 울고 마네/멀리 멀리 아주 멀리 가버린 그 사람을/바보처럼 기다리는 벽속의 남자. 이렇게 옛사랑을 기다리는 어느 남자의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그의 음악은 고급장교 출신의 가수입문(歌手入門)이라는 희소성(稀少性)으로도 한 몫 하면서 성인가요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예감하면서...

국군 방송 등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발매된 <벽속의 남자>(아남레코드 출시)가 다운타운에서 인기를 누리며 성인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단다. "가요계에 충성"을 외치면서 후속곡으로 그대여, 옛 사랑, 첫 사랑 일기, 억새 꽃, 이제는 잊어야지, 미녀도, 우리 두 사람, 그리운 고향 등의 활동으로 그가 다진 연예활동의 흔적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청주대학교 재학시절 그룹사운드의 싱어로서 또는 드럼연주자로서의 명성은 동문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그랬다. 문예극단 배우로서, KBS 젊음의 행진 6기로, 또는 드라마 청춘의 덫에 출연하였고, 그리고 원음방송, 부산99.9, SBS 가요열차에 출연한다. 국군방송 위문열차의 출연은 군 생활 중 그가 조직에 충성으로 보여준 그의 자랑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필자가 두 번째로 그를 만난 것은 2001년 그가 서울시 은평구 구청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고 있었던 현장에서였다. 아무리 보궐선거라고는 하지만 선거는 선거였겠는데 그의 선거 사무실은 선거 현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의외의 현장 이였다. 어느 마을 노인들의 사랑방 그대로였다.

노인들의 물리치료, 침뜸, 영정사진촬영 등, 이들 인생의 생(生), 노(老), 병(病), 사(死)를 토론하는 사랑방의 모양새에서 필자는 그의 생소한 이방적(異邦的) 선거방식을 읽고 묘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오늘을 위하여 1급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두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의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에서 또 한 번 낙선하는 그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꺄뮤의 이방인(異邦人)과 세르반데스의 동키호테를 비교하고 긍정적 위치에서 두 소설의 해학적 결론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언제던가 종로의 그 버릇없던 다실에서 필자에게 들려주었던 그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오늘의 그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어떤 자신의 자취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며 궁금하다고 그랬다. 정치거나 예술이거나 또는 인간의 됨됨이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곱씹을 만큼의 뒷맛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여음(餘音)이라고 표현한다. 여음요량(餘音繞梁)이라고 그랬다.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에 한아(韓娥)라는 가인(歌人)이 있었단다.

가인(歌人)이란 요즈음의 가수(歌手)쯤을 이름이다. 한아가 제나라에 갔다가 양식이 떨어져서 제나라의 성문인 옹문(雍門)을 지나다니면서 노래로 구걸을 하였다. 그녀가 여관에 묵었는데 사람들이 행색이 초라한 그녀를 업신여겨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 한아가 여관을 떠나면서 원통한 표현으로 목소리를 길게 빼어 애절하게 노래를 하였다. 멀리 퍼져간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들은 사람 모두가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그 여운으로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할 지경 이였단다. 그 곳을 떠나려는 한아를 모두가 말렸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를 좋아 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 녀는 유쾌하고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남녀노소 모두가 그녀의 노랫소리에 마음이 즐거워서 춤을 추며 함께 노래하였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그녀가 부르던 노랫소리의 여음(餘音)이 대들보를 싸고돌아 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그녀의 노랫소리를 계속하여 듣는 듯 하였더란다. 열자(列子)의 탕문(湯問)에는 요량삼일(繞梁三日)로 실려있다.

안성현씨가 지난 제18대 총선거에 즈음하여 고향의 지역구에 예비후보로 등록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그의 길(道)을 생각해 보았다.. 정도(正道)의 정(正)이란 바름을 일컫는다. 그것은 옳음을 말함이다. 정도(正道)를 정당(正當)하게 선택하는 것은 안성현씨의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는 오늘의 그것을 위하여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지방자치의 변천과정 및 유형', 그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고 들려준다. 오래 전 부터의 그의 계획된 야망임을 역설하였다.

그는 1962년 아버지 안재기(78,익산)씨와 어머니 김순덕(75,익산)여사의 육남매 중 차남으로, 죽산 안씨 문성공파 29대손으로 태어났다. 어린 마음으로 훌륭한 정치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키우면서, 지금은 수몰되어 없어진 고향의 들녘의 논배미를 뛰어다니면서 용평초등학교와 안천중학교, 그리고 진안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 진학의 문턱에서 현실적 문제에 당하여 깊은 고뇌의 방황을 맛본다.

당시 집안의 형편이거나 그의 현실적 입장이 장학금이 아니면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액장학금을 제시하는 충주대학교 예술대학(연극영화)에 진학하고 졸업한 그는 인생(人生)의 그 작은 야망(野望)을 우회(迂廻)하는 인고(忍苦)의 그 길(道)을 걸어왔노라고 술회한다. 그의 대학생활은 그를 항상 연예인의 길에 인도하고 유혹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기로(岐路)에서 항상 그는 많은 고뇌와 멈춤의 양극를 수없이 많이 방황한다고 했다.

우리의 고향사람 안성현씨.
이제 그는 귀농인(歸農人)의 자세로, 가난 했었던 아버지의 그 삶을 바꾸고자 고향으로 돌아간다. 내가 주인임을 깨닫고 그 주인정신을 이루고자 고향 진안으로 돌아간다. 돌아가 어릴적 꿈꾸던 고향의 이상향(理想鄕) 건설에 그의 작은 힘을 보탤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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