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94 성수면 용포리 송촌마을

▲ 송촌마을 입구.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빗자루나무는 골목마다 있다. 여린 연둣빛 줄기가 마당의 억센 땅을, 돌멩이를, 잡티를 어떻게 그러모을 수 있나. 자연의 비밀을 엿본 농부들이 땅을 이용하는 모습은 인간의 숙명적인 진화과정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한 뙈기 땅이라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빈집은 반쯤 허물어져 바닥이 드러났다. 깨진 됫박처럼. 그 옆집도, 옆의 옆집도, 저 멀리 집도. 집들은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바람벽을 막았다. 부연 유리창엔 몇 겹의 거미줄이 묵직하게 드리웠다. 함박눈이 쏟아지면 누군가의 눈동자가 눈 내리는 마당을 정겹게 바라봤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마을은 텅 비었다. 거인들이 쳐들어와 마을 한쪽을 뚝 떼먹고 달아났나. 빈 공터엔 망초 무리만 수북하다.

고대국가의 '소도'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싶다. 누구든 도망해 살 수 있는 자유의 공간, 금단의 지역. 빈집을 세 채나 지났다. 완성되기도 전에 허물어져 버린 것들. 도로 나가려다 혹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두리번거린다. 인생이란 것도 골목길처럼 잘못 걸어 들어가면 언제든 되돌아 나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 이삿짐을 쌀 사람들. 왼쪽부터 손복수(79), 성금예(85), 김경순(53) 씨.
남은 사람들은 이삿짐 챙길 준비부터
송촌은 더 이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하실 계단에서 몸을 굴려 어른의 몸을 거부한 소년 양철북처럼. 박아무개가 대통령 해먹던 시절, 국민체조의 기상나팔 소리가 울리기 전의 모습처럼. 흙길엔 군데군데 자갈이 박히고 접시꽃은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검붉다. 대나무만 바람 없는 산에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산을 뒤흔드는 울창한 매미소리. 쓰렁쓰렁. 대밭으로 이어지는 언덕배기로 내처 올랐다. 막대기에 줄을 팽팽하게 맸지만 줄은 빨래무게에 축 처졌다. 사람이 있다.

"영감님 돌아가시고 다시 사람을 만났지." 거리낌 없이 재혼사실을 털어놓는 그가 좋았다. 노순녀(80)씨는 서울에서 타향살이를 하다 고향 순천으로, 진안으로 왔다. 약장수가 소개해 준 진안사람.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깊고 깊은 산 속에서 새끼 놓고 농사짓고. 부산 사는 아들딸이 가끔 와 논을 갈아주고 간다. 채마밭도 일궈주고 간다. 고추·가지·토마토를 정성스레 심어놓은 텃밭. 들고양이 한 마리가 가지밭 그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40년 산 타향, 내 고향.

그는 가래빗으로 머리를 살짝 쓸어 넘긴다. 사진에 담길 나를 만든다. 남편이 없는 공간을 채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노인들은 '손주 기다리는 재미'라지만 그는 그럴 것 같지 않다. 홀로 살면서 무던히도 자신을 바라봤을 사람이다. 인생에 스스로 빛 한 줌을 보태는 사람이다. 공간을 채운 건 그의 '자아'다.

송촌마을은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다. 30년 전부터 땅주인들이 조합을 만들어 온천 개발을 시작했다. 공사가 진행 되냥마냥 시간만 흘렀다. 마을은 폐촌이 되어가고, 사람들은 한둘씩 떠나갔다. "돈 있는 사람은 다 나갔어." 손복수(79) 씨는 땅이 많아 보상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진즉 타지로 나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떠날 차비를 서두른다.

그의 손주들은 전주로 학교를 가는데 '새복 6시'에 차를 탄다. 아침밥 먹는 아이들도, 챙겨 먹이는 할머니도 고생이다. "온천 개발했으믄 보상을 빨리해줘야지, 왜 이러쿰 늑장을 부려. 애타 죽어, 죽어." 공사는 현재 중단 상태.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보상을 받지 못한 다섯 가구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송촌은 공사가 진행되면 곧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땅 없고 돈 없는 사람들만 남은 셈이다. 그는 임실 관촌이라도 나가 살아야 아이들도, 자신도 몸이 편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등 뒤로 대숲이 일렁인다. "대나무? 애들이 산에서 어린 대를 캐와 마을에 심었더니, 잘 자라데." 마을의 몇몇 대나무는 그의 손주들 작품이다. 그는 중얼거리며 혼잣말하듯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늙은이들도 여기서 죽으면 좋지. 정든 동넨디. 없어질 이 동네가."

▲ "어! 사진찍어? 잠깐 머리 좀 빗고." 노순녀 씨.
 
곰팡이꽃 피고 산돼지 돌아오지 않아
비가 오려나. 흐린 하늘이 답답하게 가라앉았다.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다. 마을에 가뭄이 들었다. 대지는 버석버석 타들어갔다. 돌탑을 쌓아 기우제를 지냈다. 힘센 장정들이 산돼지를 잡아 피를 뿌렸다. 아낙들은 키 속에 물을 부어 까불렀다. 물방울이 튀었다. 기우제를 지내면 '살짝'이라도 비가 내렸다. 그는 또 돈타령이다. 돈 좀 미리 줬으면. 그의 말라붙은 마음에 서늘한 빗방울이라도 몰아치댈까. 아니, 그것은 '돈방울'인가.

마을의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따라가듯 늘어선 집들이 간간 눈에 띄었다. 맞은편 비닐하우스에는 마른 담배잎사귀를 잔뜩 걸어 놨다. 노란 갱지처럼 그것들은 일렬로 늘어서 엄마의 젖꼭지처럼 힘차게 빨아댈 누군가의 입술을 기다린다.

현재 송촌마을은 세 곳으로 찢어졌다. 송촌 위로 다섯 가구. 다섯 가구 위로 세 가구. 송창열 이장은 마음이 아프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보상비조차 받지 못한데다 노인들이라 걱정이 앞선다. "벌통이 송촌에 있어요. 그 벌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전. 내려갈 때마다 별반 도움도 주지 못하고. 나이 든 사람들이라 탈 날까 무섭고. 이거 빨리 보상을 해 줘야지, 속상해 죽겠습니다."

온천이 나오는 곳엔 커다란 알루미늄 통을 세웠다. 보온 창고였다. 동네 사람들은 온천에서 멱을 감고 발을 씻었다. 겨울에도 '따쉈'다. 온천을 개발한 뒤 그들의 삶은 다르게 변했다. 따땃한 물에 몸 한 번 담그려고 돈을 주고 송촌으로 올 지도 모른다. 그것이 온천개발의 목적이자 마을을 갈라놓은 원인이다.

돌아오는 길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은 너푼너푼한 호박잎을, 옥수수 이파리를 적신다. 이제 다시는 기우제를 지내지 못하리라. 온천물에 돈의 이미지를 보탠 사람들이 기우제 대신 마을에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 키는 슬어 곰팡이꽃을 피우고, 산돼지는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떠난 것들은 다시 만날 수 없다.

▲ 낮잠을 깬 들 고양이.

▲ 손복수씨 집 마당.

▲ 비닐하우스에 담배 잎사귀가 마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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