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95 상전면 수동리 내송마을

▲ 내송마을 사람들. 강태순(76) 씨

장마의 중심. 7월은 비바람과 습기로 가득했다. 거센 빗물은 청룡열차처럼 빠르게 죽도를 휘감아 돌았다. 내송마을은 49번 국도 안쪽에 숨어 있다.

마을 입구에 세운 비석을 못 보고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겨울이면 낙상하기 딱 좋은 고개를 넘어야 마을이 나타난다. 어디선가 들리는 힘찬 발동기 소리. 개울물이 불어 넘쳐 급류가 되고, 그 소리는 쩌렁쩌렁 울린다.
 
비료통 메고 가던 농부 "외로워"
비가 개면 지구에서 가장 먼저 눈을 뜨는 사람들은 농부들이다. 아침 일찍부터 부랴부랴 밭으로 간다. 씨앗들이 뭉쳐 싹을 돋으면 잎사귀가 노랗게 떠서 죽는다. 이른즉,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

따로 떼어내 심어주면 살도 찌고 이파리도 튼다. 촌부 임약빈(78)씨는 흙이 뿌리에 덩어리째 달라붙은 깻잎을 자투리땅에 옮겨 심고 있었다.

허리가 아픈지 연신 일어서다 말다 주춤거린다. 임씨 내외는 정 붙이고 살던 '소리실'이 잠기기 전에 내송으로 옮겼다.

남편 박재순(78)씨는 비료통을 짊어지고 가다 글쓴이를 보자마자 소리친다. "보상은 무신!"큰소리로 잘라 말하는데, 일흔이 넘은 나이건만 목소리는 쾌활하다. "땅이 있어도 보상 항 개도 못 받았어." 간접보상의 미로에 갇힌 사람들. 물에 잠기는 농토만 행정기관이 보상해 줄 뿐 고향에 집과 마음을 두고 온 사람들은 '딴나라' 사람들이다. 마음이란 것은 평생 잠기지 않을 터인데.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사는 게 신명이 없어, 신명이."

▲ 내송마을 사람들. 정복순(76) 씨

인간의 눈이 나무의 초록빛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어진 인류의 적응훈련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 초록빛에 낯익기까지, 소리실 나무와 비슷하지만 소리실 것이 아닌 나무들.

이 나무들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박씨는 잠겨 죽어버린 나무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자신의 흙토담집이 아닌 낯선 집을 받아들이려 발버둥쳤던 나날들.

이웃들은 떠나고 고적한 마을에서 또 얼마나. 그가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디. "외로워."

임약빈 씨가 일하는 밭을 보니, 풀 한 포기 없이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농약 준 게 이러지 풀이 워매, 말도 못 혀. 이따만큼 자란당게. 늙은이들은 어쩌지도 못하고."

'농약'이란 어휘는 모순적이다. 농사에 쓸모 있는 '약'. 그 약은 산과 물과 산짐승과 사람을 곪게 한다. 비료를 다 뿌리고 오던 박 씨는 말한다.

"비료 줘야지, 아먼. 줘야지. 예전엔 돼지 먹이고 남는 똥이랑, 소똥, 닭똥 다 땅에다 찌끌고 푸고, 어휴~ 이젠 냄새나 그런 짓 못해.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멍청이나 그런 짓거리를 할까. 인자는 돈 주고 사람똥도 다 풀 수 있지. 돈만 있으면, 뭐."

▲ 내송마을 사람들. 박재순(78) 씨

사람은 쓰임이 있는 채소만 골라 길러 자라게 한다. 못 먹는 잡초는 농약으로 다 죽인다. 인간이 식물을 '취사선택'했다.

'간택' 해 정성스럽게 기른 채소도 가격이 폭락하면 경운기바퀴에 갈리는 신세를 피할 수 없다. 모순덩어리 농촌. 이 농촌에 땅 사서 큼지막한 별장 짓고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집터를 구하기 전 벌써 풍수를 다 알아본 사람들이다. 전주에서 온 대학교수들이 별장을 짓고 여름이면 가족들과 함께 놀러 온다.

평생 살아도 집 한 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땅 한 뙈기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돈 때문에 발 동동거리는 사람들에게 별장은 다른 세계의 공간이다.

그 별장은 한적하게 죽도를,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비참한걸.

소리실을 위해 빌어주기를
마을회관에는 비 때문인지 아낙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당구대 위로 분산된 공들 마냥 사각형 비대칭으로 앉아 두런거렸다.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마을에 일곱 명이 넘는다. 내송마을은 까마득한 시절에 생겼다고 한다. 정복순 씨(65)는 짚풀을 엮어 산내끼(새끼)를 만들어 지붕을 이었다.

▲ 내송마을 사람들. 임약빈(78) 씨

빗물이 초가집 처마에 대롱대롱 맺혀 낙숫물이 되어 떨어지던 집. 그 집은 헐리고 슬레이트 지붕이, 이젠 벽돌집이 서까래를 대신했다.

산 속 틈에 동네가 끼어 있어 계곡물에 발목을 적시며 냇물을 그냥 건너다녔다. 다리도 없었던 까마득한 시절.

문옥님(67)씨는 "아들이 상전국민핵교를 다녔는디, 은젠가 나무다리를 놓은 데서 자빠져 깨굴창(개울)으로 날라갔어."라며 배시시 웃는다.

그 아들은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도시에서 산다. 그는 "동네가 을매나 좋은지 몰라. 동기간마냥 같이 먹고, 인심 좋고."

원래는 열다섯 가구가 살았지만 전주나 봉동 등 외지로 다 빠져나갔다. 돈 없는 사람만 산다고 그는 푸념이다. 못난 늙은이들만…. 중얼중얼. 아들딸은 서울 가서 살고 자신만 밭뙈기 '쬐꼼씩' 지어먹으면서 근근이 살고 있다.
"산제당 입구를 가 봐. 참나무가 서 있는디, 거참. 몇 천 년 된 거라더만. 볼만 하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산제당을 추천한다. 마치 보여줄 거라곤 그곳 밖엔 없다는 듯. 산제를 지내는 날. 정월 초사흗날 삼일을 기도하고 궂은 거 안보며 지내야 했다. 돼지를 사서 동네에서 촛불을 켜고 기원을 드렸다. 지금도 산제는 이어지고 있다.

▲ 산제당으로 흘러내리는 계곡 물

당집 아래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논이 없어 그냥 밭뙈기 작은 거 하나씩 지어먹지만 새벽에 밭에 와서 풀 메고 채소에게 두런두런 이야기나 건네는 무료한 시간을 살아낸다.

산제당에 가보기로 했다. 군데군데 넝쿨이 뻗어 폐가를 휘감고 지붕을 무너트렸다. 아주 작은 동네. 아주 작은 산길. 길을 오르는데 맑은 계곡물이 힘차게 흐른다. 노루·고라니·너구리가 뛰어다닌다고 했다. 한낮인데도 우엉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뿔싸! 산제당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몇 걸음 떼었을 뿐인데, 발목 부근까지 진흙이 덮쳐 녹아내려 '메가톤바'처럼 쫀득거렸다.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근처에서 알짱대다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참나무가 보고 싶었다. '참'은 한글로 '진짜'란 뜻이다.

 진짜 나무, 참나무. 진흙이 그대로 질척거리기를 빈다. 이번 해에는 도토리가 많이 열리기를. 사람들이 '도토리묵'을 만들려 다 쓸어가지 않고 다람쥐가 먹을 식량은 남겨놓기를.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은 뒤에 진흙이 마르기를.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산제당 참나무에게 소리실을 위해 빌어주기를.

▲ 내송마을 앞 풍경. 길은 밭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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