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96 동향면 성산리 장전마을

▲ 장전마을 모습
장전마을은 원래 장진(將振)마을이었다. 정여립이 성을 쌓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이 마을에 자주 내려와 마을을 '장진'이라 지었다. 그가 죽고 나서 용담현에 소속되어 있던 이 마을은 70년대 장전마을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부자가 살았다고도 전해진다. 매를 길들여 어깨에 얹혔다 내려보내면 골짜기가 두려움으로 떨었다. '사냥제'는 산제와 함께 서서히 맥이 끊겼다. 매는 먹이가 없어 도로로 밀려나 죽어가고, 마을은 사람들이 떠나고 이제 12가구만 남았다. 모두 24명이 모여 산다.

이젠 소리 없이 사라진 소리실을 지나 고개를 꺾어 한참을 고물자동차를 달그락거리며 올라가다 내려가면 거기 장전마을이 있다. 산비탈 아래 우산 속살을 뒤집어놓은 품새로 더위에 풀이 죽은 호박잎이 보이면 그리로.

비 쏟아진 산비탈에서 소담하게 핀 버섯처럼 무리지어 피어난 집들. 동네회관 앞에 서자 사방팔방을 휘휘 둘러봐도 산뿐이다. 빽빽하게 산을 두른 나무들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팔하게 살아 녹색 보자기를 드리운다. 천반산은 그렇게 흙 묻은 구근 몇 개를 통째로 박아놓은 것처럼 싱싱하다.
 

▲ 막내아들 형호씨와 함께 살고 있는 이정임씨
적막· 적막· 적막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네 살 때 열병을 앓았다. 어린 시절엔 학교 아이들이 무던히도 놀렸다. '국민핵교 3학년' 때 공부를 그만뒀다.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개가 사납게 컹컹 짖는다. 봄에 캐낸 마늘묶음을 처마 그늘에 걸어놓고, 가마에 장작불을 지피고 있는 어미. 더운 한낮인데도 장작 활활 타오르는 기세가 박력 있다. 사골인가.

"언젠가 큰비가 내렸는디 논에 돌뗑이(돌덩이)가 휩쓸려가 그만…."
모든 것을 잃었다. 논밭이 못 쓰게 됐다. 보상을 받았지만 땅이 작아 몇 푼 쥐지도 못했다. 자식들이 대주는 용돈으로 '손꾸락만한' 텃밭 돌보며 그냥저냥 막내아들 전형호(46) 씨와 지낸다.

형호 씨는 휴대전화 액정에 코를 박고 있다. 열심히 누군가와 화상대화를 나누던 참이다. 액정에 누군가가 열심히 손짓을 한다. 또래 장애인이다. "속이 터져서. 내가 저것 때문에 죽지를 못혀, 죽지를…눈을 감아도…."

이정임 씨(78)는 그만 말을 맺지 못한다. 그의 눈이 시큰하다. 이씨는 아들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호 씨의 코는 액정에서 빠져나올 줄 모른다. 어쩌면 짓물러진 노모의 눈을 바라보기 싫은 지도.

형호 씨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공사장에서 일용직 일을 했다. 시멘트 포대를 짊어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노가다'였다. 공사장에서 하루 일을 하면 조금이나마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밖에 나가 돌아다녀도 4차선 도로공사를 제외하곤 별다른 공사를 찾아볼 수 없다. 기껏 '어무이' 텃밭이나 도와주는 한량일 뿐만 아니라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 모양이다. 시골에 사는 장애인, 그것도 국민학교 자퇴가 최종학력인 그에게 기회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친구와 화상 통화를 하고 있는 전형호씨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의지가 없어요.' 그럴 만도 하다. 첩첩산중. 창문 너머 산이 가까이 있다. 이 마을은 산에 바짝 붙었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우거진 숲. 잘 짜인 섬유 결. 올올이 빽빽하다. 그것은 형호 씨에게 단절을 의미했다.

집을 나설 때 김 씨는 솥뚜껑을 열고 옥수수를 꺼내 비닐에 쥐어 준다. 못난이 옥수수. 이가 성글다. 옥수수는 한 번도 농약세례를 받지 않은 것처럼 납작하다.

마을 평상에서 강냉이를 뜯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이지 '고립무원'이다. 산, 산, 산이다. 형호 씨의 절망은 이 산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는 곤란. 넘어가도 산, 그 너머도 산. 외지인들에겐 차마 알 수 없는 산골세계의 비정 같은 것일 게다.

닭장 안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닭을 꺼내 목을 조르려던 참이다. 1분 1초가 닭에겐 간절한 시간. 생사를 넘나드는 경계다. 별생각 없이 불쑥 이장님 어디 가셨냐고 묻자 모른단다. 닭의 눈은 휘둥그레져 있다. 닭이 불쌍해 조금만 더 이야기를 끌까 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다.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잠깐 뒤를 보니, 그의 손아귀에 힘이 더해진다.

금강엔 몇몇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다. 나들이를 나온 일가족이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속에나 들어가야 청량감을 느낄까. 백사장엔 나무 한 그루 없다.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강가에서 사람들은 말이 없다. 습기를 품은 늘쩍지근한 공기만 떠돌아다녔다.

강가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장전마을을 바라본다. 마을회관의 지붕 자락이 보일락말락한다. 마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화상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는 옥수수를 찌고, 누군가는 닭을 잡고 있다. 모든 것이 무심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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