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김병섭 씨
김병섭 씨
정천면 망화리 이포부락 출신
(주)서해도시가스 고객지원본부장
모정초 제19회 동창회장
(12, 13, 14, 15대)국회의원 보좌관 역임
(사)국회입법정책연구원 이사
국회의원 보좌관회 회장 역임
재경진안군민회 부회장 역임

옛날 활을 쏘던 사정마루 아래 강 쪽은 배를 띄워 건넜다하여 배나들이라고 불렀다. 거기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었고, 연자방아, 디딜방아도 있었었다.
이포마을은 섬 아닌 섬이 되어 강물이 둘러져 있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거나 겨울에도 강을 건너는 일이 고통으로 다가오곤 하였었다.

징검다리도 놓아보고 나무다리도 놓아보았었지만 그 노력이 여간 한 것이 아니었다. 사근다리란 강 건너 신작로를 따라서 옛날 물길이 있었을 때의 다리를 이름함이었다. 모정리 두곡마을의 한 뜸이었던 신흥마을에서 긴 농로를 따라서 이어진 200여m의 이포교가 놓인 것은 1980년대쯤이었다.

이 포교를 건너 마을에 들어서면 옛날 휘양군수가 명당 터에 욕심을 내어 묘를 썼다고 전하여 오는 휘양날을 지나면 거기 울창한 소나무 숲 동산이 있었다.
겨울에는 눈썰매장으로 아이들이 모여 들었고,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던 마을 제일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용담호에 수몰되어 간 추억들을 새겨 보면서 김병섭씨는 그 시절 어머니를 따라서 드나들었던 조그마한 암자의 풍경소리도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김해김씨 삼현파 72세손인 김병섭씨는 1988년에 돌아가신 인자하시던 아버지 김두성씨와 1999년 돌아가신 어머니 이순임 여사의 모습을 찾아서 가끔씩 용담호에 잠겨진 그 고향의 물결 위를 둘러본다고 그랬다. 짙은 향수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거기서 느끼는 것은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의 어쩔 수 없는 추억이라고 했다.

김병섭씨는 1955년 2월, 3남4여 형제 중 둘째로 탄생한다.
고향에서 모정초등학교와 용담중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대전중앙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서 고향을 떠난 것이 열일곱 살 때였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 그는 거기에 적응하는 세월동안 처음으로 고향의 아침과 고향의 저녁이 그렇게도 그리울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상지대학교 경영학과를 마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장군(將軍)에 대한 무한한 꿈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는 공군 제2사관학교에 입교하고 그 길을 선택한다. 빨간 마후라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알려진 공군조종사의 생활은 그의 꿈에 알맞게 익어가고 있는 듯 했다. 초급장교 시절 조종사들의 관행적인 연말파티의 파트너였던 장춘화(청주, 50)씨와 열애 끝에 1983년 크리스마스에 맞춰 결혼에 골인하는 행운도 얻어졌다.

인생의 가는 길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조그마한 일들이 그것이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표현하기에도 대수롭지 않은 지극히 단순한 비행 사고를 일으키면서 그의 오랜 꿈을 접어야 하는 사건을 맞는다. 비행시간 300시간을 기록한 공군대위로 예편한다.

김병섭씨는 아버지의 유훈(遺訓)을 항상 기억하면서 그것을 그의 생활철학으로 새기면서 살아간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인간의 훈훈한 정이 넘쳐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었다.

1984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원에서 '중동지역 수출다변화에 관한 정책수립'이란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1985년 12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그렇게 2000년까지 그 둥지, 한국정치의 모든 것을 그는 섭렵(涉獵)하였다.

그는 원칙과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는 움츠리지 아니하고 더욱 당당하게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 남이 알아주던 아니던 흔들리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공자가 말한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야(知松栢之後彫也),'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세한(歲寒), 날이 추워졌음은 세상이 어지러워 졌음을 이른다. 역경에서 신념을 지키는 것은 세한심(歲寒心)이다. 시절이 어려워도 절조(節操)를 잃지 않겠다는 것은 세한맹(歲寒盟)이다. 그것을 지키려는 것은 세한조(歲寒操)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歲寒圖)에서 그 뜻을 담아내었고, 의사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이 글을 정성으로 옮겨 적었다고 전한다. 그도 그렇게 이 뜻을 새기려고 한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병섭씨.
좋은 시절에 존재를 판단하기 앞서 시련의 순간에 절의(節義)를 지키려는 그의 마음을 우리는 지켜보기로 한다. 추위가 오기 전에는 모든 나무가 다 푸르다. 추위를 겪고 나서야 상록수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연락번호: 011-308-5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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