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계속되는 노우정, 김상욱씨의 아이들 사랑

▲ 노우정, 김상욱 씨가 함께 냉동탑차에 아이스크림 상자를 싣고서 사진을 찍었다.
공장 굴뚝의 연기가 시대의 희망으로 여겨지던 1970년대 중반. 가난을 면치 못하던 농촌의 젊은이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도시로 떠나던 시절이다. 그 시절 농촌의 아이들은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해맑은 얼굴로 뛰어놀 수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놀던 아이들에게 돈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극히 일부 애들을 제외하곤 가게에서 간식을 사 먹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그 시절 아이들의 간식은 자급자족에 가까웠다. 콩 서리를 비롯해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주로 먹었고 그나마 가공식품이라 할 수 있는 게 부침개나 누룽지였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농촌의 아이들에게 사먹는 군것질 거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바로 하드(빙과류)가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화려하지도, 다양하지도 않았고,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당시 하드는 인기 만점의 군것질 거리였다. 용돈이 없는 아이들은 하드 아저씨가 오길 기다리며 비료포대, 폐지, 빈병 등 재활용 되는 것들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돈 대신 하드와 바꿔 먹었던 것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진안 아이들의 입을 즐겁게 한 하드 아저씨는 지금도 아이스크림 상자를 차에 싣고 진안과 장수 일대를 누비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노우정(58), 김상욱(51) 씨.
김상욱 씨는 열아홉의 나이에 운전면허를 땄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자격증이었다. 김씨는 덕분에 트럭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트럭으로 먼 거리를 다닐 수 있었기에 우리군 면단위에 있는 가게는 김씨가 도맡았다. 운전면허라는 기술 덕에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반면, 20대 중반부터 시작한 노우정 씨는 자전거로 일을 시작했다. 트럭과 달리 자전거로는 먼 거리를 다닐 수 없기에 진안읍은 노씨가 담당했다. 아무리 진안읍이라고 하지만 자전거로 가막리 골짜기를 찾아 가기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자전거 뒤 칸에 나무로 된 아이스박스를 싣고, 그 안에 비닐 포장도 없는 하드를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넣고 진안읍 구석구석을 다녔다.

자전거로 2년을 다니고서 오토바이로 바꿀 수 있었다. 김상욱 씨는 트럭으로 가게만을 상대로 빙과류를 공급했지만 노우정 씨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진안읍에 있는 가게에 공급했다. 공급을 끝낸 노씨는 가게가 없는 마을들을 찾아 진안군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지역의 각종 행사장은 물론 학교 운동회나 소풍 때면 늘 노씨가 함께 했다.

하루는 정천면 조림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때의 일이다. 이날도 역시 빙과를 팔기 위해 운동회를 찾은 노씨는 시끌벅적한 운동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학교 운동장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무슨 소린가 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아아! 노우정 씨, 노우정 씨. 집에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니 언능 가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도 노씨는 남은 빙과를 모두 팔고서야 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 때의 아들이 지금 스물아홉이다.

모내기철에 들녘을 달리다 보면 논둑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고 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밥을 먹자고 하면 마지못해 점심을 얻어먹었다. 그리고는 빙과 하나씩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나눠줬다. 돈으로 따진다면 아주 비싼 점심을 먹은 것이지만 노씨를 그걸 따지지 않았다. 이웃 간의 따뜻한 정이 힘든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노우정 씨와 김상욱 씨의 빙과업은 힘이 든 만큼 수입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도 용담댐이 축조되고 지역의 인구가 줄면서 하향세를 보였다. 예전엔 매일 배달을 해야 했지만 이제는 하루걸러 일을 하고 있다.
한 여고생이 자신이 배달한 빙과를 먹고 즐거워했는데, 이제는 그 여고생의 딸이 같은 학교를 다니며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세대가 바뀌고 빙과의 모양이 바뀌었지만, 그것을 나르는 노우정·김상욱 씨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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