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면 무릉리 이 규 홍

 

  이 글은 유정길(한국불교환경교육원 사무국장, 생태사회연구소 연구원)님의 [경제중심에서 생태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재해석하여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던 시절에는 개미와 같은 근면과 성실이 제일의 미덕이었다.

 

  독재 권력과 자본이 민중의 숨통을 옥죄고 짓밟던 시절에는 자유, 민주, 평등이 최고의 선이었다.(지금이라고 뭐 별반 달라진 것도 없지만) 우리 어른들께서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흘리신 피와 땀을 값없다 못할 것이며, 독재 권력과 자본의 횡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애쓴 선배들의 노력을 철없는 짓이었다고 못할 것이다.

 

  이렇듯 매시기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선을 이루기 위해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싸워왔고 어느 정도의 성과도 이루어 냈다.

 

  그럼 등 따습고 배부른 지금 시기에서의 최고의 선은 무엇인지 담배 한 개비 피워 물고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남 해치지 않고, 사기 치지 않고 돈 잘 벌며, 체제나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을 무리 없이 달성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끝이라는 거다. 풍요로운 삶을 향해 세상이 정한 규정에 따라 모두가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마음으로 달려가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생각을 좀 해 볼 필요가 있는데, 생각 많이 하면 머리 빠진다고 그만 생각하라는 거다.

 

  지금 우리가 하는 짓이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해서 역사마저 우리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지는 않을 거라는 비밀을 내가 지금 말해주려는 거다.

 

  정당한 방법으로(법대로) 했던 우리의 행위가 바로 지금의 환경의 위기와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결과로 남았다면 억측인가?

  좀 더 소유하고, 좀 더 풍요롭기 위해 쎄가 빠지게 달려왔던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공동자살구역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면 억측인가?

  옛날 어른들은 착하게 살면 자기 대에 못 받으면 자식 대에 가서라도 꼭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꼭 착하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리고 꼭 잘사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다. 못되게 살라는 말이 아니고, 찢어지게 가난하던 옛날로 돌아가라는 말은 더욱 아니다. 제대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거다. 당장의 삶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겠지만 먼 미래까지 생각하는 긴 안목으로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말이다.

  큰 산불이나 지진이 나면 한낱 미물이라고 여기는 쥐가 제일 먼저 그것을 알아차리고 피한다고 한다. 하물며 인간이 그 무거운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않는 바에야 미래에 닥쳐올 전 지구적 재앙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마구 써대는 지구의 모든 자원은 분명 제한돼 있다.

  한방에 내가 싼 똥을 백리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수세식 변기도 모자라 닦지 말고 씻자고, 비데 아니면 변기도 똥꼬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세상이라고 허세를 떨 때가 아니다 . 지금은.(솔직히 나도 한 방에 날려 보내는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오늘날 자원무한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는 산업사회는, 가용자원이 ‘한계’가 있다는 유한성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이 한계는 ‘자연자원 매장량의 유한성’, 외적 교란에 대한 생태적 수용능력의 한계성, 그리고 생태적 파괴에 대한 비가역성’을 말한다.  생태계의 물리적 조건은 이러한 무한 성장을 용인하지 않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는 이러한 무한주의에서 비롯된 산업사회에서 지구자원에 대한 자기 정화능력의 벗어난 파괴에 대한 지구차원의 반작용인 것이다.  지구자체가 제한된 수용능력(인구)과 생산능력(모든 형태의 자원), 그리고 흡수능력(공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제약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Dobson.A.,1990:28)

  오늘날 토지나 농지,산 등 자연에 대한 개발권은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 정부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공시적(共時的)결정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문제는 통시적(通時的) 결정체계를 요구하고 있다.(加藏尙武,1991,35)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성장(ESSD: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의 개념은 ‘미래세대에게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현재의 발전’을 뜻한다. 미래세대에게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발전은 오늘날과 같은 공시적인 논의 체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ESSD의 개념은 시간을 뛰어넘는 통시대적인 결정과 사고를 요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에게 땅이나 자연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은 없다. 매매나 양도 등의 개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본래 내 땅이라든가 내 소유의 강물,내 소유의 산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만이 갖는 관념일 뿐이다. 인간이 소유의식을 갖기 시작하면서 ‘내 것’이라는 사고를 갖기 시작했고 동시에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소유의식의 확대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대립과 분쟁, 투쟁과 패배의식을 갖게 한 원인이었다. 과거부터 전쟁의 원인은 영토확보와 관련되었다. 폭력의 원인도 또한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위한 투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소유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소유하는 반 자연, 이것이 바로 생태위기를 초래한 또 하나의 원인이다. 오늘날 상품의 생산은 모두 자연물의 가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부도덕한 매매형태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투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산업주의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토지뿐만 아니다. 인간이 생산하는 상품도 고유의 가치로서 보다는 시장체계에서 형성된 ‘가격’의 지불에 의해 ‘내것’이라는 관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사회의 진보를 경제 중심적, 물질의 풍요, 생산성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생태위기시대의 진보의 척도는 과거 양중심적 경제발전의 기준이 아니라 삶의 질과 양적 기준을 동시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생산성이나 소비의 수준이 낮더라도 삶의 질이 높아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역사의 발전이며, 진보이고 대안적 삶인 것이다. (유정길 한국불교환경연구원 사무국장)

  지금 웰빙이라는 말이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게 불리지만 난 그 말뜻을 잘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 건강하고 행복한 삶쯤으로 어림짐작을 할 뿐이다. 아무리 죽을병에 걸려 피가 마르는 목마름에 있는 사람이라도 자식의 심장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는 어이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언제까지고 땅속에는 자원이 무한하고, 숲은 늘 푸르고, 우리가 마시는 공기와 물은 늘 깨끗할 거라고 믿는 바보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가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정해야 한다.

  이 산과, 강과, 바다가 지꺼라고 우기지 말아야 한다. 욕먹는다. 두고두고.............

그런 땅에다 골프장이라니.

다음호에 보자 골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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