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108 성수면 중길리 중마마을

▲ 마을입구 중마마을숲. 2009년 여름에 촬영한 것이다.
입춘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얼굴에 닿는 바람은 차갑다. 작년 여름 울창했던 마을숲은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도 70여 그루에 달하는 느티나무와 참나무로 이루어진 마을숲은 이 마을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에 마을숲을 없앴다가 마을이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마을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는 아름다운 숲이다.
 
구불구불 이어진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다
중마마을은 성수면 중길리에 속한 행정리로 중군, 사기점, 마치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중마와 인접한 마을로는 북쪽으로 달길, 남쪽으로 오암마을이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성수면 용포리, 동쪽으로는 마령면 추동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발고도 275m에 위치한 중마마을은 마을 뒤에 549m의 국사봉이 있고, 마을을 따라 남북으로 중마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입구 마을숲을 지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러 가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거나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 작물들 사이에서 구부린 허리를 펴기 위해 잠시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마치교를 건너 사기점 마을 사이로 난 임도를 따라가는 회침이골은 예전에 용포리에 사는 아이들이 통학을 위해 이용했던 길이다.

아스팔트 길이 끝나는 마치 저수지 위로는 전주를 가기 위해 많이 이용했던 마치재가 있다. 마치에서 전주로 가는 20여km에 이르는 길로 백운, 마령 사람들도 모두 이 고개를 이용했다. 그래서 마치재를 가기위해 걸었던 이 길 위에는 주막들이 있었다고 한다.

"주막에서 아픈 다리도 쉬어가고, 사는 이야기도 주고받고, 막걸리 한 잔 나누던 주막은 이제 없어졌지만 그 시절이 그래도 그립다. 군 제대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마치재였는데 이미 길이 묵어버려 갈 수가 없더라."고 말하는 양영목 씨의 얼굴에 추억이 어린다.
 

▲ 한겨울이 되면 마을회관은 아지매들의 웃음소리와 밥냄새로 늘 따뜻하다.
명당자리 중마마을 유래
중마마을은 중군과 마치의 첫 글자를 합해 중마로 부르게 되었다. 중군은 중군대좌(中軍對座)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6.25당시 마을 내에 무기고가 있어서 항시 보충병들이 상주하면서 군대가 움직이는 중심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마치는 완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며, 구한말 무렵에 원님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갔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마치 저수지를 만들기 전에 20가구가 넘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3가구가 살고 있다. 사기점은 예전에 사기를 굽던 곳이라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예전에는 무수한 사기 파편들이 나왔으나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 한병애 할머니의 집은 불을켜놓아도 어둡다. 그러나 이미 어두워진 할머니의 눈에는 오히려 너무 밝다.
함께하는 마을
마을숲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수령 150여년, 둘레 3아름 정도의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가 있는 쉼터에는 돌탑이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장군이 손을 꼭 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1989년에 도난당했다. 그 후 콘크리트를 쌓아올리고 그 위에 선돌을 올려놓은 형태로 남아 있다. 쉼터는 주로 마을 사람들이 오며가며 쉬는 곳이기도 하고, 정월대보름에 달집태우기 행사를 하기도 한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동근(65) 씨는 "대보름달이 뜨는 시간에 맞추어 달집을 태우며 소원도 빌고 그러지. 예전에는 오암마을이랑 같이 허는 풍물패가 있었어. 그래서 오암에서부터 풍물을 치면서 우리 마을까지 왔지. 근디 요즘 사람이 있간디. 그니까 간단하게 달집 태우면서 음식이나 먹고 그라고 말지."라고 말했다.

또한 백중날에는 술멕이 행사를 마을회관 앞 광장에서 진행한다. 직접 돼지를 잡아 빨래터 옆 광장에 커다란 가마솥을 얹고 돼지를 삶는 것으로 시작되는 행사는 어르신들의 윷놀이와 어머니들의 왁자한 이야기, 그리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소리로 가득하다.

마을회관 앞에 신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을 아주머니들이 모여 놀이를 즐기고 계신다. 그 틈에서 이장은 신종플루 접수를 받고 있지만, 아지매들은 별 관심이 없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한병애 씨는 올해 91세로 이 마을 최고령자이다. 90도로 꺾인 그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집은 옛날 초가집 그대로이다. 부엌도 허리를 숙여야 일을 할 수 있는 옛날 그대로이지만 할머니 혼자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낡았다고 버리는 것들을 아직까지 지켜나가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삼 마음이 웅성거린다. 할머니가 굽은 허리로 키우고 산과 들을 다니면서 캐온 여러 가지 나물들을 꼬깃꼬깃한 비닐봉지에 넣어주신다.
"갖고 가서 요렇게 지져먹어, 할 줄은 알어?"하며 전해주는 할머니의 손이 따뜻하다.
 

▲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도 놀고싶은 우리의 욕구를 빼앗지는 못하리.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
중마마을은 예전에는 80가구가 넘는 마을이었으나, 시나브로 줄어들어 현재는 27가구가 살고 있다. 그래도 다른 마을에 비해 젊은 세대들이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동근, 김성근, 김종근, 김종기 씨는 모두 친척관계이다. 그리고 김종기 씨 아들인 김기수 씨가 그곳에서 결혼하여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그 외에도 현재 이장을 맡고 있는 진현호와 전용기 씨 등 젊은 세대들이 귀농하면서 마을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현재 마을에는 총 11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초등학생이 3명, 중학생이 1명, 미취학 아동이 7명이다.
 

▲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는 바람이 너무 차고 어두워진 길에 배는 고프다.
젊은 이장이 주축이 되다
중마마을 진현호(40) 이장은 2000년에 귀농하여 올해로 꼭 10년이 되었다. 처음 마치에 들어오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금은 사기점에 터전을 잡고, 유기농으로 농사 짓는 방법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만들어가고 있다.

"일체의 농약이나 화학비료,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대규모 단작보다는 소규모 다품목 가족농을 지향하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작물들은 한살림이나 곳간지기 소식지를 통해 판매를 합니다. 이 마을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저를 외지인으로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진현호 이장의 얼굴에서 젊은 귀농인들의 미래가 보이기도 하다.

이제 겨울이 되어 해가 지기도 전에 모두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고 밥 짓는 냄새가 가득할 것이다. 추워서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아이, 마을회관에 모여 한바탕 판을 벌이던 아지매들도,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던 아버지들도 이제 사람의 집에 불이 켜지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불이 켜지는 중마마을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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