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110 성수면 중길리 달길마을

▲ 이인덕 할머니의 하얀 머리와 회색빛 눈동자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인간은 산 아래, 그리고 강 주변을 따라 마을을 형성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길을 내어 다른 마을로 이동했고, 나무를 베어 땔감을 마련했고, 나물을 뜯어 산길을 넘어 생계를 유지했다. 그건 생명의 길인 산이 있기에 가능했다.

성수면의 끝자락에 자리한 달길마을 또한 만덕산과 세월을 함께 했다. 762m의 만덕산은 완주군 상관면, 소양면과 상관면 정수리,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만덕산에 만 명이 모여 숨어 살아 덕을 보았다 하여 만덕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암마을 초입에서 시작되는 총 3.8km의 만덕로를 따라 걷는 내내 만덕산의 안질바우, 쌀겨바우, 벼락바위 봉우리들이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다. 달길마을은 성수면 중길리에 속한 행정리로 상달, 중달, 하달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중달을 기준으로 웃뜸, 아래뜸으로 부르기도 한다.
 
◆회색의 아름다움
상달에는 만덕산의 기운을 받고 사신 듯한 정정한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1912년생으로 올해로 98세를 맞이한 이인덕씨다. 100세를 가까이 두고 계신 할머니는 담배를 피워 물며 꼿꼿한 허리를 세우신다.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회색빛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새삼 마음이 숙연해진다.

"16살에 시집갔으니 뭐 아는 게 있어? 게다가 신랑은 한 살 더 어렸으니 더 모르지. 열사흘 만에 시집을 오게 돼서 내 어머니한테 뭐라 그랬어."
그래도 시집와서 시집살이는 한 번도 안했다. 시집살이를 안했다고 해도 왜정 당시와 한국전쟁을 모두 이 마을에서 겪었으니 어려운 살림이야 굳이 말하지 안 해도 짐작이 된다.

"첫 아이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는데 그게 체해버렸어. 뭘 먹어도 안 낫는거야. 아무것도 못 먹고 시름시름하니까 어디서 그러는데 백도라지를 먹으면 낫는다고 그래가지고 시어머니가 그 깜깜한 밤에 오암마을로 갔어. 그때 오암 딱 한 집에 백도라지가 있었거든. 그걸 구해가지고 와서 그거 먹고 낫지.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이렇게 오래 사나봐."

사람의 얼굴에는 살아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인덕 할머니의 얼굴에는 그 어려운 시절을 묵묵히 지켜온 고집이 담겨있다. 맑은 회색빛 눈동자처럼.
 

▲ 이용주 이장
◆마을 곳곳 숨어 있는 전설
상달 마을 끝에는 1985년에 만들어진 상달방죽이 있다. 이 저수지 자리에 큰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또한 중달마을에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황토방 아래에 위치한 장군바위에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어느 노인이 많은 짐승들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이곳을 지나다가 보자기가 터져 짐승들이 도망가면서 생긴 짐승의 발자국과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장군바위 밑에 장군수가 있는데 이 물을 먹으면 나병이 낫는다고 하여 환자들이 많이 찾았고,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만덕산 안질바위 밑에 만덕암이란 절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절을 도시락절이라고 불렀어. 그 절에 물이 귀해서 밥을 먹을 수 가 없어가지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거든."라고 이야기하는 이용주(64세)이장은 태어난 곳은 완주지만 세 살에 달길에 들어와 살았으니 달길 사람이다. 달길에 사는 사람의 절반이 이 마을 출신이다. 그러기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일처럼 이웃을 살갑게 대해주는 마을이 달길이다.

"예전에는 기우제를 크게 지냈어. 만덕산 정상에서 지냈는데, 음력 초사흩 전날 미리 가서 나무를 재어놓고 불을 환히 밝혀두면 밤 12시에 가서 새벽 3시에 하산해. 이때 돼지를 잡아 피를 뿌리면 신이 그 피가 더러워서 비를 내린다고 했지. 그래서 마을에 부정타지 않은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었지. 여자들은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산신제도 지냈는데 음력 정월 초사흗날 밤부터 시작하여 새벽 무렵에 끝나. 제주는 섣달 그믐날에 정하는데, 나이가 많고 부정타지 않은 사람으로 정해서 하지. 그래서 제물을 장만할 밑집도 부정타지 않은 사람으로 정하고, 정월 초사흗날 아침에 장을 보러 가면 비린 것을 제외하고 설기떡, 삼색과실 등을 준비해서 지내고 그러지. 산신제를 마치고 하달마을 돌탑이 있었어.거기서 물합이라 해서 간단히 음식을 준비하여 다시 한 번 제를 지내고 그것이 끝나면 설기떡을 집집마다 돌려 먹어. 그러면 그 해 건강하게 지낸다고 했어."

이용주 이장의 얼굴에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기우제나 산신제 같은 행사가 없어진 곳이 달길마을 만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노인들이 많은 시골에서 이렇게 큰 행사를 진행하기에는 힘에 벅차다.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이 아쉬워 한번쯤 붙잡아 보고 싶은 마음에 손 한 번 내밀어 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그저 추억이라고 부르는 이름뿐이다.
 

▲ 상달마을 어머니들이 이인덕 할머니 집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시골에서 겨울을 나는 재미다.
◆달길마을 어머니들~
달길에 사는 어머니들이 가장 많이 넘어온 고개로 가래울재가 있다. 마령면 덕천리 추동마을에서 하달로 넘어오는 고개이다. 지금은 묵어서 잡풀만 무성하지만 그 길을 걸었던 어머니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존재한다.

마령면 덕천리에서 가래울재를 넘어 시집 온 백금순 어머니(75세)는 그래서 덕천댁이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두 살 나이에 시집을 왔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 당시 스물두 살은 지금 나이로 생각하면 서른두 살과도 같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동생을 돌보고, 빨래터에 가서 시린 손을 불어가며 빨래를 하고, 나무를 해서 군불 지펴 밥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남편 얼굴 한 번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 넘어 시집을 왔다. 지금을 살고 있는 시골 어머니들이 거의 모두 그럴 것이다. 그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어머니들이 있기에 지금의 삶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골짝에 뭐 볼 거 있다고 와?"라고 말하시지만 젊은 사람 한 명이 낯설지만 익숙한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내심 반갑고 밥 한 그릇 더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이 달길마을 어머니들이다.

▲ 생명의 길을 내어 준 만덕산
▲ 한여름이면 저 나무 밑은 농부들이 새참을 먹는 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