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 112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

▲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인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 전경
인간은 땅을 밟아야만 살 수 있다. 땅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대하는 지리과학의 하나인 풍수지리에서 가장 좋은 지형으로 꼽는 것이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이 그런 곳이다. 마을 뒤로는 봉황산이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끼리 섬진강으로 나가 천렵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주말이면 외지에서 온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곤 한다.
그렇게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마을 사람들 또한 흐르는 강처럼 물 흐르듯 살고 있다.
 
◆오동이 양반을 아세요?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은 봉촌, 상좌 혹은 웃멀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웃뜸, 아래뜸으로 나누기도 하나, 현재는 두 마을 합쳐 봉좌로 부른다. 예전에는 80가구가 넘는 마을이었으나, 시나브로 줄어들어 현재는 28가구가 살고 있다.

봉좌마을은 조선 중엽에 공주이씨 이공원, 이공적 형제가 마을에 터전을 자리 잡으면서 공주이씨 본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공주이씨가 터전을 잡기 전에 남원 양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마을에 스님이 시주를 하러 온 것을 대나무로 때리며 내쫒았다. 이에 큰 스님이 와서 물길을 돌리면 큰돈을 벌거라고 하여 물길을 돌렸는데, 이후 재물이 빠져나가면서 망하게 되었다. 이후 공주 이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공주이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11가구만 존재한다.

공주이씨 제각인 충절사가 있어 매년 음력 2월 20일에 각지에 있는 공주이씨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충절사는 조선조 중종때에 세워진 것으로 고려 말 이명성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당시 병화로 소실된 뒤 유림들이 공주 월성동에 다시 세워 명탄서원으로 명칭을 고치고, 그 후 호남의 사림들이 봉좌마을에 건립하여 충절사라 하였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뒷산에 봉황이 살고 있었다고 하여 봉촌이라 부르게 되었고, 봉촌마을 동쪽으로 이어진 마을을 상좌 혹은 웃멀이라 부르면서 봉촌과 상좌를 합쳐 봉좌라고 부르게 되었다.
봉좌마을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전해진다.

예전에 소금장사를 하면서 많은 재물을 모았던 오동이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자손이 없어 돌아가시면서 마을에 재산을 모두 내어 놓았다고 한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오동이 할아버지 산소와 묘비를 세웠고, 1991년에 비지재를 넘어 오암마을로 가는 산중턱에 자리를 옮기면서 양력 1월 15일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합동제사를 지낸다. 오전에 부녀자들이 음식을 준비하는데 모두 생식으로 준비한다.
 

▲ 따뜻한 햇살에 길바닥에 앉아도 즐거운 입담이 오고간다.
◆터널같이 외로운 것이 삶이련만...
봉좌마을에는 혼자 사는 노인 분들이 11가구나 된다. 대부분이 여자 노인분이다. 남자 혼자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노인들의 삶은 고되다. 또 그런 노인들 대부분이 질병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대도시에서처럼 복지 행정이 잘 이루어져 있어서 혜택을 많이 받지도 못한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좌포리 원좌마을 보건소에서 정기검진을 받거나 마을회관으로 직접 나오는 검진을 받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다는 것이다.

긴 터널처럼 외로운 것이 삶이지만 같이 하자 약속했던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마저 출가시킨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 채워도 부족하다.
올해 76세를 맞이한 이선순 어머니는 한여름이면 유모차를 끌고 나와 마을 입구 쉼터에 늘 앉아 있는다. 한여름 바쁜 농사꾼들이 잠시 쉬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어머니의 말동무가 된다. 겨울이면 마을회관으로 가서 병원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지낸다.
올해 84세인 이복남 할머니도 웃멀마을 쉼터에 혼자 앉아 있는다.
"자꾸 몸이 아파."
나이 들면서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어머니의 손은 힘이 없다. 길을 나서며 뒤돌아보니 한없이 작고 쓸쓸해 보인다.
 

▲ 올해 처음으로 버섯재배를 시작하는 이귀자, 차상기 부부의 손길이 바쁘다.
◆부지런한 이장님
성수면에서 유일한 여자 이장인 이귀자 이장(56세)은 늘 부지런하다. 남편 차상기씨(62세)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다. 2000여 평이 넘는 오이 농사를 지내면서 올해는 영지버섯과 표고버섯을 재배할 목적으로 참나무를 사들였다. 참나무를 쌓아놓고 증기로 쏘인 후 종균을 접종한다.

"버섯 수확할 때 놀러와요. 같이 수확도 하고, 먹기도 하게."
봉좌마을 인심이 넉넉함은 내어놓는 음식에서도 알 수 있다. 손수 만들었다는 강정과 밤, 사과, 그것도 모자라 인사를 하고 나서는 손에 기어이 귤 몇 개를 쥐어준다.
이귀자 이장은 고향이 봉좌마을이다. 결혼 후에 김제에서 몇 년 살다가 친정아버지가 사시던 100년이 넘은 집에 들어와 부엌만 입식으로 고쳐 살고 있다.

집 입구에 소 한 마리가 외로이 있다.
"애들이 모아준 400만 원으로 소를 샀어요. 애들이 준 것이라 아까워서 다른 곳에 못 쓰겠더라구요."
소여물을 주는 차상기 씨의 손길에 더 정이 가는 것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소 한 마리, 개 한 마리도 자신의 가족처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시골에서 사는 어르신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 어떤 것 하나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누구는 궁색스럽다 할지 몰라도 어렵지만 풍요롭게 시골살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 올 한해 농사의 시작이 될 고추 모종내기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비닐하우스에 모였다.
◆땅을 만나다
봉좌마을의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일직선으로 된 길은 마치 주민들의 심성과 닮아 있는 듯하다. 지금도 자주 이용하는 비지재는 성수면 중길리 오암마을로 넘어가는 길로 전답을 이용하기 위해 많이 다니는 길이다. 경운기를 타고 쭉 뻗은 아스팔트 길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손에 호미 하나 달랑 들고 비지재를 넘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땅을 만나는 즐거움이 보인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농부들의 손길은 이미 바쁘다. 광장에 쌓여진 퇴비는 마을 앞 너른 들에 뿌려질 것이다. 감자는 이미 심어놓았고, 마늘도 잘 자라고 있다. 고추 모종을 내기 위해 비닐하우스에 마을 주민들이 모였다. 마을회관에 모여 같이 점심을 해먹고 오후부터 시작된 모종 작업에 즐거운 입담들이 오간다.
웃멀마을에서 해가 떠오르면 봉촌마을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아직은 해가 짧아 금방 깜깜해지지만 봉좌마을 농부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해가 남아 있다.

▲ 농사의 밑거름이 될 비료가 마을 앞 광장에 한가득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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