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천 윤 씨
동향면 능금리 내금출신
서울 중랑구 중랑신문 대표
의정부백병원 장례식장 대표
중랑구사회복지협의회 홍보분과위원장
대한체육회중랑지부 사무국장(역임)
재경동향면 향우회장

 

‘父母愛之 喜而勿忘’ 부모가 나를 사랑하시거든 기뻐하며 잊지말라.
부친께서 그의 나이 27세적 세상을 뜨셨고 지금 75세의 노모가 익산의 형제집에 생존하여 계시는데도 그는 가끔씩 부모님에 대한 불효의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나날이 많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곱남매의 장남으로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던 그 시절, 동향국민학교와 안천중학교를 졸업한 박천윤씨는 이제 그의 가정형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장리변을 얻어들고 출향을 결심, 그가 둥지를 틀 곳이 이리시였다. 지금 그의 결심은 주경야독에 대한 욕망으로 굳어진다. 말하기 좋게 주경야독이지 야간고등학교와 고학의 길이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던 시절이었다.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이니 망정이지 그 세월의 피맺힌 사연들이야 어디 글이거나 말로서 다 이룰 수 있을건가. 박천윤씨는 그렇게 이리에서 법무사사무실과 변호사사무실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주경야독의 욕망을 이루어내고 이리공고를 졸업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부친께서 돌아가시는 비운을 맞았고 설상가상 청운의 꿈으로 생각하며 응시했었던 검찰사무직 시험에도 낙방, 몇 년간 사법시험에 도전, 좌절의 시간들이 더욱 그를 움츠리게 하는 마음의 한으로 간직되어 갔다.
“호랑이를 그리려고 작정하였으면 고양이라도 그려보자” 아버지 잃은 집안의 가장역에 어깨는 움츠리고 방황하던 박천윤씨. 1978년 겨울 서울을 향해서 제2의 도약을 나선다. 홀로되신 어머니와 어린 형제들을 익산에 남겨둔 채 그는 무거운 발길을 서울역에 내려놓는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살적. 박천윤씨는 지금도 가끔씩 눈을 감고 그때를 생각한다.
주마등이라고 하였던가, 정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날의 영상들이 일곱형제들의 찌그러지고 배고품에 겨워하던 그 모습들의 일그러진 영상들이 그의 가슴에 찡한 서러움으로 그렇게 스쳐간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시거든 기뻐하며 잊지 말자. (父母愛之 喜而勿忘)
박천윤씨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저렇게 쭈굴쭈굴 늙어버린 어머니의 지나간 세월들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가끔씩 국민학교적 마을서당에서 익혔던 그 글자를 잊지 못한다. 주방기구 판매업소에서의 일년간은 그에겐 그래도 지금의 아내 김옥영 여사를 얻을 수 있었던 행운의 시절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사장 여동생으로 회사의 경리사무를 맡고 있었던 김옥영 여사와 눈이 맞은 것이다. 지나간 시절의 그 어렵고 아니꼬웠던 그 사연들이 지금은 그래도 가장 용기로 대처하였던 청춘의 시절로 가끔씩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는 새로운 삶의 용기를 부어주는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박천윤씨는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식솔 많은 집안의 장남으로 충청도 양반집안의 규수를 감싼 그에겐 지역의 배타성과 무일푼인 그에게 고운 눈길을 줄 터 없는 처가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라며 그래도 자신의 용기와 사랑으로 이겼노라고 의기양양해 하였다.
씽크대 대리점으로 10년. 주방기기 공장을 경영하며 아파트 시공업체로서 승승장구하는 듯 하던 그에게도 시련이 또 왔다. 인간의 무한한 질주를 신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며 신의 제지를 뿌리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는 비운도 함께 맞는다.
인간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철학을 배우면서 공허한 한 세월이 그의 가슴에 앙금을 다가왔다. 붉은 매화꽃 한 송이를 죽어간 아이의 무덤에 바쳐놓고 옛 고려시대 죽어간 여인의 넋을 기려 꾀꼬리가 되어간 도장을 생각하며 박천윤씨는 그때부터 한 겨울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꽃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항상 그의 가슴에 아비의 넋을 그렇게 묻어 놓고 있노란다.
한서택배(정기화물)로 5년, 박천윤씨는 ‘식자우환’이라고 자신의 과욕을 고백하며 인생의 공수래 공수거 앞에 숙연함을 고백한다. ‘식자우환’이란 자신의 어린시절 법무사 사무실과 변호사 사무실을 전전하던 그 시절, 검찰사무직과 사법시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익혀두었던 그 법률지식이 택배회사의 운영하면서 법원공매에 참여 한 것이 두 번째 실패의 원인이라는 그의 고백이었다.
1952년생(54세) 박남박씨 직장공파 27대손 박천윤씨. 그는 지금 지역신문 ‘중랑신문’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의 온갖 활동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도전과 꿈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답지 않은 인생에 관한 갖가지 고뇌와 회한은 함께 그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의 걸어온 역정을 들어보고 짚어보면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한서택배 이후 장의차 사업에 이어 구리병원과 구리신라병원에서 칠년째 장의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이제 장의사업이 기피사업에서 선호사업으로 옮겨가는 것을 그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래서 그는 건국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어릴적부터의 박천윤씨의 배움에 대한 한 맺힌 도전임을 알 수 있다. 고결과 충심과 인내와 맑은 마음으로 꽃말을 갖고 있는 매화를 그가 좋아하는 것도 근면과 내핍과 정직을 그의 생활 철학으로 그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도 어려운 가정에서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면서 자수성가에 성공한 박천윤씨가 오늘의 좌절에 잠겨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우리는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서너송이 매화가 봄의 희망을 상징한다면 활짝 핀 매화의 군무(群舞)는 천리까지 퍼지는 향기로서 쓸쓸한 겨울의 희망이 될 것인 즉, 이제 우리의 진안사람 박천윤씨는 고향을 향해서 그렇게 떠나올 적 지켜보아 두었던 천반산이 그의 귀향을 기다라고 있음을 귀뜸해 주자. (H.P : 011-247-7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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