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손규상 씨
손 규 상 씨
성수면 좌포리 양산마을 출신
임대영화가설극장 운영
경남기업 노무자
삼호건설(사우디:리아드)
한일개발(사우디:카미스)
한일개발(사우디:나빅)

단야(鍛冶)는 대장간 화덕 속에서 쉼 없는 풀무질로 새파랗게 핀 숯불에 이글이글 달구어진 무쇠다. 마침내 오랜 통한의 녹을 벗는 강철이다. 하나의 인생이 발아(發芽)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그 단야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의 강철 같은 인생들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오늘의 이 주인공 손규상씨를 생각해냈다.

사차원(四次元)의 자유인(自由人) 손규상씨.
필자는 사람이 좋아 친구를 좋아하고 술판에 잘 어울리고 얼굴엔 항상 동안(童顔)의 웃음으로 우선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할 줄 아는 그를 선의(善意)의 의미로 그렇게 부른다. 필자와는 한 마을에서 네 살 터울로 태어나 거의 한 시대에 친구처럼 함께 자란 그에게 고향사람 이야기에 한번 나갈 것을 부탁 하였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극구 사양한다. 천하의 무식쟁이로 노동판에서 기운밖에 쓸 줄 모르는 자신이 감히 어떻게 신문에 나가겠냐는 것이다. 몇 년을 만나면서 고향사람 이야기가 딱 그 무식쟁이가 자수성가(自手成家) 하는 이야기이고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더 잘 나가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도 하는 것 아니냐고 우겨서 겨우 허락을 받는다. 단 인간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하였지만 인간적인 이야기래도 사랑방에 모여앉아 긴긴 겨울밤 친구 집 닭서리 하던 것 같은 사건들은 빼기로 한다.

그의 고향 양산마을은 해발459m 대두산(大頭山)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섬진강 줄기의 오원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평화로운 고장이다. 양산(陽山)은 양화(陽化)와 산막(山幕)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양산마을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영역으로 있을 때 손씨(孫氏)일가가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물 맑고 산 좋은 풍혈냉천(風穴冷泉)과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던 온천(溫泉)을 찾아서 정착하면서부터 손 씨 집성촌으로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앞 냇가를 건너서 옛 부터 산전(山田)을 개간하여 생활하던 토착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산막이라 칭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텅 빈 산등성이만 흔적으로 남아있다. 비지정 관광지로 이름 나 있는 풍혈냉천은 성수온천과 연계한 관광개발권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1945년 12월 손성열씨를 아버지로 송혜순 여사를 어머니로 하고 5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해방정국에서, 6.25국란 중에는 두 번에 걸쳐 불타버린 마을의 참화 속에서도 그는 무럭무럭 자랐다.

1960년대의 농촌은 가난과 반거 청이 청년들의 회의(懷疑)로 가득찬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5월이 오면 보릿고개를 넘기에 모두가 힘겨워 했다. 시름에 겨워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리의 손규상씨, 타고난 영혼이 자유로워 자유인 이였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살고 싶었던 우리의 고향사람 손규상씨는 그 시절 임대영화 가설극장을 끌고 진안, 임실지역을 무대로 흥행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16개월, 그의 앞에 보리 60가마의 부채만 고스라니 남았더란다.
바람 이였단다. 바람처럼 가고 싶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어느 날 그는 배수평 들녘에 아버지가 매어 둔 황소를 몰고 가출을 감행한다.
황소를 판 당시 돈 팔만 원으로 빚을 청산하고 전주 남문시장의 신발집 점원 1년, 전주 태평동의 석유회사 관리직원 2년 6개월, 그리고 이번에는 상경 길에 오른다. 서울은 만원이더란다. 잉여인간(剩餘人間)들의 대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해병대에 지원하고 4주 훈련 중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회의 속에서 탈영할 수밖에 없더란다. 서울의 사당동의 친척집에서 가축을 돌보면서 2년을 보낸다. 1965년 정식영장을 받고 입대 1969년 11월 제대한다.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영혼도 철들어 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단다.
고향선배의 중매로 오정해(마령)씨와 결혼도 서두르고 함께 상경하여 월세 방에 움막을 틀었다. 밭떼기 야채장수로 2년, 400만 원짜리 전셋집으로 이사도 하고, 노동판에 눈을 뜬다. 경남기업 건설현장에서는 집도 짓고 정화조도 묻으면서 노동현장에 익숙해 갔다. 손규상씨 그에게 있는 것은 힘뿐인 것을 그는 깨달았다고 그랬다.

1970년-1980년대는 가난한 이 나라의 근로자들이 중동지역의 건설현장에 파견되어 나름대로는 개인과 국가경제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던 시절 이였다. 우리의 손규상씨도 시대의 흐름을 눈여겨 놓치지 않고 거기 뛰어 들었다. 거의 신혼 이였던 아내와의 의견교환은 여러 차례의 충돌과 설득의 과정을 어렵게 거쳤다. 앞날의 행복과 슬하 아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어렵게 하는 결심 이였다. 1980년 2월 그는 낭인처럼 고국을 떠난다. 사우디의 리아드에서 1년, 사우디의 카미스에서 2년, 그리고 사우디의 나빅에서 1년, 이렇게 세 차례씩이나 계약을 연장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음습하고 익숙하지 못한 기후에 견디면서 4년을 버티고 돌아온다. 4년 만에 만난 아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철철 흘리던 공항에서의 추억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고 그랬다.
어려움을 잘 견디면서 세 아이를 잘 길러냈고 집안 살림을 훌륭하게 지켜준 아내의 고마움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우리의 고향사람 손규상씨.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이 4차원에 속한 것이다. 영원한 이 땅의 노동자 손규상씨는 이제 머지않아 예부터 어렵다는 인생살이 칠십년을 맞을 것이다. 4차원의 영원한 자유인, 필자에겐 영원한 친구 같은 그에게 김해화시인의 노동판 이야기의 몇 절을 전한다.

멈춘 시계가 5시53분을 가리키고 있는 저녁/폐자재가 굴러다니는 강변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은/ 판자로 덧댄 문을 헌 잎처럼 가끔 벌려서/개나리 나무에 음표를 매달고 있습니다./
멀리서 기차는 시간을 토막 내며 철교를 지나고/술병을 세운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얼굴에 팬 주름을 악기처럼 연주하며/뽕짝으로 지르박으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없는 날에도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녹슨 난로 옆엔 사람들이 따뜻하게 늙어 갈 것입니다./종교처럼 늙어가는 술집의 멈춘 시계는/ 여전히 저녁 5시 53분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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