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정윤우 씨
정 윤 우 씨
안천면 신괴리 괴정마을 출신
석탄공사 노조대의원 역임
(주)정성개발 대표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난 품어 가 반길이 없을 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노계(蘆溪) 박인노(朴仁老)는 조홍시가(早紅枾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선조 34년 9월에 그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찾아가 일찍 익은 홍시(감)를 대접 받았을 때 문득 회귤고사(懷橘故事)를 생각하고 돌아가신 어버이를 서러워하면서 지은 사친가(思親歌)이다. 그가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고 생각하는 애절한 심정이 우리의 가슴에 생생하게 전하여 오며 그의 효심이 눈앞에 선하게 보이고 한마디로 풍수지탄(風樹之嘆)을 연상케 하는 노래다.

회귤고사(懷橘故事)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 육적(陸績)이 어렸을 적, 원술(袁術)을 찾아 갔었는데 원술이 귤 세 개를 먹으라고 주었다. 육적이 그것을 먹지 않고 품속에 품었다가 일어설 때 가슴에 품었던 그 귤 세 개가 방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원술이 괴히 여겨 까닭을 물으니 집에 계신 노모께 드리려고 그랬다고 대답하더라는 고사인데, 이 후 이 고사(故事)는 곧 효(孝)를 의미하는 육적(陸績)의 회귤고사(懷橘故事)로 그렇게 전해 온다.

필자가 오늘 우리의 고향사람 정윤우씨를 소개하기에 앞서 장황스럽게 이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는 것은 열세 살에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와서 사십년을 회고하는 그의 하나하나의 일들이 어쩌면 하나 같이 남의 이야기라 하기 보다는 우리의 이야기 그 것 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 평생 두 가지 작은 희망을 큰 회한으로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고 그랬다. 그 하나는 그의 아버지의 환갑(還甲)잔치를 돈 벌고 성공하여 반드시 고향에 돌아와서 남들처럼 성대하게 치르겠다는 그 마음 속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평생을 내색 없이는 살아왔지만 그도 '짧은 가방끈'을 항상 그의 가슴에 응어리처럼 안고 살아 왔다고 술회 한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고 했다던가. 10남매를 거두시느라고 평생 타고 난 그 고생을 안고 사시다가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신 그의 아버지는 이제 겨우 철이 들어 지키고 싶어 하는 어릴 적 굳게 약속한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더란다. 이제 그는 한 분 생존 해 계시는 어머니를 향한 반포지효(反哺之孝)의 정을 다하여 남은 인생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우리의 고향사람 정윤우씨는 1958년 1월 어느 추운 겨울날 고고의 성을 울리면서 한 많은 이 세상에 태어난다. 괴정마을은 1914년 2월까지 용담군 이북면 신괴리 괴정마을 이였다가 그 해 3월1일부터 진안군 안천면 신괴리 괴정마을이 되었다. 괴정동문에는 세 개의 지석묘가 있었고 문턱바위에 세 개, 새뜸 앞 도깨비 정자나무 앞에 세 개 이렇게 모두 아홉 개의 지석묘가 있어 구암리라 하였다가 오래된 정자나무 괴목이 있어 괴목정으로 부르다가 오늘의 괴정이라는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정윤우씨는 의성정씨의 후손으로 그의 선대부터 이 마을에서 서울집이라고 불리는 보성할머니댁에서 집안일을 거들면서 살아왔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1926년에 암각에 각자한 괴정동문처사정공응신시거지(槐亭洞門處士丁公應信始居地)가 있는데 정응신(1586-?)은 의성인 의성군(義城君) 영손(令孫)의 후손이며 이조판서 현(炫)의 7대손으로서 선조 정유년에 금산으로부터 이북면 괴정리에 들어와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윤우씨나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하고 있는 '서울집'이 함께 의성정씨의 낙향한 후손들이 아닌가 짐작이 간다.

정윤우씨는 여기서 안천국민학교를 졸업한다. 정유우씨의 마지막이기도 한 학창시절은 그의 어린 마음에도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배운다는 의미가 그에겐 크게 없었다고 그는 기억하고 있다. 기성회비가 밀려 학과시간에 집으로 쫓겨 오던 기억이, 가을 소풍에 참여하지 못하고 땔나무 지게를 짊어지고 뒷산에 오르던 추억도 그에겐 있었다. 그것이 후일 평생을 두고 그의 인생에 한으로 새겨진 '짧은 가방끈'에 관한 그림자로 또는 인맥형성 등에 흠으로 남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었단다. 하여튼 그는 졸업식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그 해 정월 아무 의미도 간직하지 않은 마음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그것은 청운의 꿈도 그런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고향의 서울집에서 또는 그의 선대들이 그들의 먼 족간 친척들 후손들의 집안에서 그랬듯이 그도 그런 마음 이였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그의 인생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잠자고 있었던 그의 뇌신경이 기지개를 켰고 어두움의 찰나(刹那)에서 밝은 광음(光陰)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연륜과 함께 세상에 익숙해져 갔다. 수많은 업종과 업태들이 그를 스쳐갔다. 수입품 아케이드에서 출발하여 리어카를 끌고 고물행상으로 2년을 보내면서 한 맺힌 배움에의 문을 두드려 야간재활중학교에도 나가본다. 그러나 그에게 서울은 그렇게 만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한산인부(閑散人夫)로 전락하여 전국의 공사현장을 찾아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미장을 배우고 시멘트 콘크리트를 익혔다. 조립식 아파트를 만나고 철근 엮기를 배웠다.

용접기술을 익혔고 재개발 사업장에서 철거작업에 익숙해지면서 비정(非情)의 곁에서 가슴 아픈 상처를 경험하면서 어쩌면 그는 역설적으로 세상살이에 익숙해지고 있었다고 그는 슬프게 이야기 한다. 정윤우씨는 자신의 인생은 항상 바람과 함께 하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것이 함께 자란 고향의 친구들이거나 또 다른 지인들로 하여금 그를 4차원 인생의 전형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 바람을 따라서 그는 태백의 어룡탄광에서 작지 않은 세월 10년을 보내고 일본을 2년6개월간 다녀왔지만 그것들이 그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실패였었다고 그는 자신 있게 강조한다. 귀국하여 『정성개발』을 창업하고 17년, 수많은 현장의 사건들이 그의 곁을 스쳐갔다. 사업이 고스라니 절단 난 상태였던 I.M.F시절도 있었고 하도급현장에서 일어나는 드라마 같은 사연들을 여기 다 털어놓을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의 고향사람 정윤우씨
그는 안천면 방지골 선산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외로움의 연속 속에서 어찌해도 어찌할 수 없는 참으로 마음이 공허(空虛) 할 때면 찾아간다고 그랬다. 그리고 한 인간의 실패와 좌절에서 다가오는 외로움이 무엇인가를 묻는다고 그랬다. 그리고는 그냥 하늘을 본다고 했다. 하늘에는 잃어버린 고향이 있었고 그 잃어버린 고향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도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망운지정(望雲之情)이였다.
연락처 : 011-826-2788/서울취재본부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