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전북대의학과 이동근 박사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틈히 고향 찾아

▲ 이동근 박사
진안군청 뒤 당산마을. 이곳에서 뛰놀던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어린 시절 구술치기, 비석치기 등 여느 아이처럼 당시 놀이문화를 즐기며 자랐다. 또 성냥과 소금만을 들고 집을 나선 아이는 점심을 산과 들에서 해결했다.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먹고, 보리를 서리해 배를 채웠다. 그렇게 산으로 들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어린 아이는 진안초등학교와 진안중학교를 졸업했다. 전주고등학교로 진학해 청소년시기를 보내면서 진로 결정을 해야 했다.
그 결정은 의사였다.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의학과 병리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이동근(59) 박사다.
 
◆의사의 의사가 바로 이동근 교수
이동근 교수는 내과와 외과의처럼 직접 환자를 치료하지 않지만 환자의 질환에 대해 최종진단을 내리는 위치에 있다.

한마디로 이동근 교수의 진단 없이는 수술도 진행할 수 없다. 환자의 진단이 이동근 교수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치의 오차도 범할 수 없다. 오직 정확한 진단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종합병원에서는 매우 중요한 분야가 병리학이다.

병리학과와 함께 중요한 분야는 마취과와 방사능과다. 세 분야는 종합병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분야다. 그만큼 병리학, 마취, 방사능과는 종합병원에서 필수적이다.
"나이가 들면 일이 줄어들 줄 알았죠. 그렇데 똑같아요. 젊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일은 줄질 않네요. 저희가 하는 일은 환자의 조직 세포를 검사해 진단을 해주는 일을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긴박할 때는 10분 안에 진단을 내려야 합니다. 수술도중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세포는 12시간, 조직은 24시간 내에 진단합니다. 검체의 종류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이 다릅니다. 그리고 진료 지원 업무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직접 검체 하는 경우도 있지만, 검체를 채취해 보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가 많다 보니 일도 덩달아 많아요. 정말 일이 많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환자가 없는 것 같아도 병원만 가면 환자가 많다. 이 많은 환자의 최종 진단을 이동근 교수가 한다.
 
◆진안에서의 추억 아직도 '생생'
당산마을과 진안. 이곳은 이동근 교수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교육행정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임실에서 3년을 살았지만 진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진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안중학교를 졸업했다.
아쉽게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진안을 자주 찾았다.

"어린 시절 생생하죠. 골목 하나하나 모르는 데 없어요. 마이산도 걸어다녔어요. 진안중학교 근처에 있는 저수지에서 수영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면 안 됐지만 개울에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 같아요. 수영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저수지를 왔다갔다 횡단했어요. 당시에는 개헤엄이었죠. 지금은 정식으로 수영을 배웠지만요."
오랜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고향 진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주 찾는 진안, 성묘·애경사·등산 등
"진안은 자주 가요. 추석성묘를 위해서도 가고, 친구들 애경사, 친지분들이 많이 살고 있으셔서 진안을 찾게 되죠. 그리고 등산하기 위해 진안을 찾곤 합니다. 구봉산, 운장산 등 수시로 드나들고 있습니다. 교통도 편리해져 자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동근 교수는 틈틈이 진안을 찾는다.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향에 정착하고 있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애경사가 있으면 언제나 찾는다.
또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 때문에라도 아름다운 산을 가진 진안은 이동근 교수에게 좋은 코스다. 더욱이 진안에 살고 있는 친지를 뵙기 위해서, 성묘를 위해서는 진안에 와야 한다.
그래서 이 교수와 진안은 때려야 땔 수 없는 불가분리적인 관계인 것이다. 비록 몸은 전주에서 살고 있지만 언제나 진안을 생각하고,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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