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사비 털어 꽃잔디 축제 마련한 이기선 씨

▲ 이기선 씨
이기선(75) 씨. 그는 예순다섯에 고향을 찾았다. 이때부터 356일 가운데 300일을 고향에서 시간을 보냈다. 고향에서 정착한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기선 씨는 예순다섯의 나이에 선산(先山)을 가꾸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동안 모은 자산으로.

그 세월이 10년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132,231㎡(4만여 평)를 혼자의 힘으로 꽃 잔디 공원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꽃 잔디 축제'를 할 정도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꽃 잔디 축제가 아니더라도 구경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더 많다. 이기선 씨가 조성해 놓은 꽃 잔디를 구경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로.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진안군 행정으로부터 보조를 받은 것 아니냐고'. 군 행정에 확인하면 알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씨가 선산 꽃 잔디 공원을 만들기 위해 쓴 돈만도 엄청난 액수다. 개인이 사용한 돈으로는.
 
◆대단하다
개인 돈 40억 원을 선산 가꾸기 위해 사용할 수 있을까?
이기선 씨는 했다.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지금도 한해에 2억 원의 돈으로 선산을 관리하는데 사용한다.
그 기록을 매일 일지로 남긴다. 그러나 쓴 돈의 합계는 내도 누계를 작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10년 동안 선산을 가꾸면서 일지를 적었어요. 선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여자 5명, 남자 5명 등 10명이 일을 해야 하죠. 그렇다 보니 인건비가 많이 들어요. 인건비는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아요. 꽃 잔디는 약을 하지 않고, 손으로 일일이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인건비가 많이 들죠. 그날그날 합계는 나오죠. 인건비 얼마, 유지관리비 얼마 등. 하지만, 누계는 안내요. 얼마가 쓰였다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누가 보면 싫어할 수도 있고…."

지금은 화려하고, 정돈된 모습이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이기선 씨의 손길이 닿아 지금의 꽃 잔디 공원으로 변화되었다.
"장비도 없는 것이 없어요. 잔디 깎는 장비에서부터 잔디 뜨는 장비, 나르는 장비 등 필요한 장비를 모두 구입했죠."
 
◆편안한 삶, 고난의 길
40억 원이면 노후에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선 씨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고향을 생각하면서 종중과 후손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공원을 만들어 보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 누구나 찾는 만남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인간은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죽어요. 저도 마찬가지죠. 원연장 마을에서 태어났고, 선산이 있는 원연장 마을에 묻힐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향과 함께하고 싶어요. 선산을 위해, 고향을 위해 뭔가 남겨 놓고 싶어요. 만남의 공간도 좋고요. 후손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세월이 흐르면 후손, 혈족을 몰라요. 많은 사람이 찾아와 구경하다 가는 공간도 되었으면 하고요."

이기선 씨가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원연장마을을 찾고, 진안을 찾는다.
그의 희생은 작으면서도 큰 변화를 진안에 남겼다.
 
◆꽃 잔디 공원, 앞으로 유지·운영이 문제
지금까지는 이기선 씨가 꽃 잔디 공원을 유지 관리했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더는 개인 혼자서 꽃 잔디 공원을 유지 관리하기에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기선 씨는 더 좋은 꽃 잔디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개방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익도 없어 유지 관리는 개인 사비로 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건은 고스란히 이기선 씨의 짐이다.

"뉴욕과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는 공동묘지가 많아요. 그러나 이러한 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많은 사람이 공동묘지를 찾죠. 꽃 잔디 공원도 외국처럼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해왔고요. 그런데 나이는 먹고, 사후 일이 부담이 되죠. 모아놓았던 돈도 다 쓰고. 이제는 몸이 따라 주질 않아요. 예전엔 안 그랬어요."
힘들지만, 이씨는 그래도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꽃 잔디 공원을 위해 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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