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사비 털어 꽃잔디 축제 마련한 이기선 씨 (2)

본보 460호에 고향사람으로 게재된 이기선(75) 씨. 그가 꽃 잔디 공원을 홀로 조성하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이번 호에 게재한다. 더불어 그의 여동생 남편이 종중 땅에 묻히게 된 사연, 자신이 묻힐 곳을 마련하면서까지 꽃 잔디 공원을 조성해 후손들과 더불어 많은 사람이 찾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이기선 씨의 헌신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애착이었다. 지난호에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서 이번 호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 이기선 씨

◆모든 재산, 꽃 잔디 공원 위해 사용
이기선 씨가 태어난 곳은 원연장 마을이다. 이곳에서 여덟 살까지 생활을 했다. 이후는 전주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직장 및 사회활동으로 연결됐다.

이기선 씨는 노동부에서 공직생활을 했고, 농사도 지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농·축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모은 재산을 이제는 종중과 진안을 위해 쓰고 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종중을 위해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이기선 씨는 10년간 꽃 잔디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이곳을 지금은 많은 사람이 머물다 간다.

"비록 고향을 떠나 삶을 살았지만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있죠. 고향이 그리웠어요. 고향에 돌아와서는 단순히 종중 산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어요. 만남의 장소도 되고요. 그런데 지금은 일이 커졌어요. 너무 일을 벌여 놓았죠."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기선 씨는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고향을 위해 헌신할 것을 찾다 종중 산을 꽃 잔디 공원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그러나 범위가 커졌다. 아주 많이.
넓게 조성된 꽃 잔디 공원은 많은 사람이 찾는다. 평일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이기선 씨 때문이다.
 
◆종중 땅, 누구나 찾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이기선 씨는 종중 땅을 뉴욕 및 오스트리아 등의 중앙공동묘지처럼 만들고 싶어했다. 뉴욕과 오스트리아는 묘지를 공원화했다. 누구도 혐오스러운 곳으로 여기지 않는다.

더욱이 묘지가 있는 곳을 산책하고, 가족끼리 소풍을 즐기는 곳이 되었다. 이기선 씨 역시 꽃 잔디를 심어 가꾼 종중 땅이 유럽과 오스트리아 중앙공동묘지처럼 누구나 찾아와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기선 씨는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식들과 사위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모은 재산을 종중 땅을 가꾸는데 쓰겠다고.

"종중 땅을 꾸미면서 자식들에게 이야기했어요. 앞으로 내가 번 돈은 내가 쓰고 가야겠다고요. 지금까지 너희를 가르치고, 직장도 있는 자식들에게 너희는 노력만 하면 잘 살 수 있으니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을 다 쓰고 가겠다고요."
 
◆이기선 씨의 친여동생 남편 묻힌 선산
이기선 씨가 조성한 꽃 동산에 친여동생 남편(매제)이 묻혀있다. 독일 사람이지만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을 한 것이다. 여동생 남편도 화장보다는 매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종중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었다. 종중 땅에 매장해 달라고.
"외국 사람으로는 힘든 일이죠. 매제는 종중의 동의를 얻고, 살아서 항공료 등을 모았어요.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 비행기로 운구해 매장했어요."
 
◆고향에 대한 '애착'
이기선 씨가 고향에 대해 애착을 갖는 것은 이기선 씨의 부모 때문이다. 이기선 씨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고향에 대한 애착을 보며 자랐다.

"1933년. 할아버지 아버지 시절이죠. 이때 아버지는 7형제 셨어요. 어렵게 사셨죠.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소작을 하셨어요. 이때 소작의 반절을 지주가 갖고, 나머지 반절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키우면서 농사를 지었죠. 그러다 보면 식량이 떨어져 지주에게 손을 벌리곤 했어요. 이때 아버지는 이대로 가면 죽는다고 생각하셨는지 여러 명이 모여 기금을 마련했어요. 기금 마련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 땅 살 때 도와주고, 소 살 때 도움을 주었죠. 그분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자랐죠. 그래서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라남도 곡성 종중 땅이 아닌 진안 종중 땅을 꾸미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기선 씨는 꽃 동산에 잠들고 싶어했다. 이씨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더 좋은 꽃 동산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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