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을 갖고 길러온 사업체 대물림

임 종 진 씨

정천면 갈용리 농산마을 출신

한림사(외서전문) 대표

생활체육 서초구 배드민턴클럽 상임고문

서초구 방배파출소 청소년선도위원

재경진안군민회 부회장 역임 (현)감사



흥학당은 정천초등학교의 전신으로 일인들이 폐쇄령을 내려 문을 닫을 때까지 큰 인물은 기르고자 문중의 자제와 지역의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

1942년 이러한 명당의 터, 마을에서 중농의 부모님 밑에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임종진씨는 부자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려움 모르고 자라난 당시로는 운 좋은 산골 아이었다. 정천국민학교와 정천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릴 적부터 주위의 어려운 농민들을 보면서 병중에도 병원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그들 시골사람들의 현실에 눈 뜨면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의문에 마음쓰기 시작하여 한의학으로 봉사하는 생활에 골똘하게 된다.

 

천자문, 사자소학, 명심보감, 소학, 대학, 중용을 거쳐 맹자 7권과 동의보감 2권을 띠고 의학입문, 장부총론, 약성가, 방약합편 등 의서에 심취되어 한의사로서의 길에 정진하여 인간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내가 찾아내겠다는 일념으로 하늘을 보며 땅을 걸었다.

하늘에 흘러가는 별똥별을 따라가며 인생의 이치에 관하여 고민하던 그에게 어느 초봄 그의 스승이었던 서당 훈장님께서 이제 이 시골에서는 그에게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는 통고를 받는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정에서 순간의 뒤바뀜이 인생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을 우리는 가끔씩 보게 되지만 임종진씨 그의 인생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마주칠 수가 있었다.

 

60년대 초, 우리의 역사가 그러한 한 시절이 있었다. 한의학으로의 봉사를 필생의 업으로 생각하며 한의학에 집념처럼 정진하여 왔었던 그가 상경하여 종로통의 내노라하는 한의원 등을 찾아서 헤맨 그에게 당시 병역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자의였던 타의였든간에 ‘병역을 필한 자’가 아니면 당시의 사회에서는 거의가 행세할 수 없는 그러한 시절이었다. 찾아간 유명 한의원 등의 상담에서도 그의 실력은 인정하나 그 하나 그 나이의 병역미필이 문제가 되곤 했다. 군 지원도 인정되지 않는 당시의 상황이었고 그래서 그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그는 당시 마음을 정리하고 공백을 이용하여 한의학원에 입학을 정한다. 그러나 그에겐 그것도 허사였다. 개강하루 전에 그렇게도 그가 기다리던 소집영장을 받는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임종진씨는 이때의 심정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입대하고 제대하고 다시 방황하는 그의 마음이 계속되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원래 그의 부친은 막내의 한의학 입문을 어려운 길임을 설득하고 반대하는 편이었다.

 

그의 인생이 운명적으로 또 한번 바뀌어지는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야 했었던 임종진씨의 그 가난한 영혼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그러한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그는 인간의 고통을 읽었고 허망한 인생의 행로를 찾아본 것이었다.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인간으로서 미래의 세계에 영혼의 씨앗이 되어 전파하리라 이렇게 하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제게는 다시 찾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는 배반을 용서하는 것은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고 했다. 가까운 이웃의 배반을 보면서 세상의 이치가 심히 부끄러운 적이 있었다. 마음의 분노가 자신을 괴롭히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묵상하며 그가 지금까지 배워 온 학문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마음의 도덕 앞에 조용히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그렇게 산다. 매사를 용서하며 산다. 긍휼은 그의 몸에 배어있는 생활이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편하게 한다.

매사를 그의 현실에 맞추어 그에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생활은 항상 즐거움이 넘치는 욕심 없는 생활이다.

스물일곱 살에 시집와서 한 아들과 두 딸을 낳아 준 그의 아내 송춘자(청주출신)씨가 그에게는 그렇게도 고마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어려웠던 한 시절을 함께 참고 살아준 그래서 그는 가끔씩 시도 때도 없이 붉은 장미다발을 주책없을 만큼 사들고 집에 들어가는 치기도 보인다. 그것이 참 인생의 모습임을 그는 강조한다.

요즘 임종진씨는 가끔씩 인생의 무상을 느끼면서 지나온 세월들을 더듬어 보는 버릇들을 발견한다. 그의 모든 의지를 다해서 어렸을 적 꿈으로 배워오던 인생의 봉사자로 살아보려는 그것들이 무너진 지금 주위의 버려진 영혼들을 찾아서 선교의 길에도 나서본다.

 

이제 임종진씨는 운명적으로 바뀌어오면서 삼십여 년간 애정을 갖고 걸러온 그의 사업처인 한림사를 그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대물림하기로 작정했다. 외서전문 공급사업인 그의 한림사의 때 묻은 간판을 쓰다듬으면서 그의 새로운 감회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우리 시대에 하기 어려운 대물림을 하면서 그의 마음은 그렇다.

우리의 고향사람 임종진씨. 그도 이제 세월 앞에 장사 없이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으로 세월을 추억으로 음미하며 수몰되어간 고향의 뒷동산을 그리워한다. 농촌의 대물림을 강하게 권유하던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면서 죄송한 불효가 앞서 온다.

배드민턴 서울시장 배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였을 만큼 그 계통의 체력관리에도 열심이었던 임종진씨였지만 요즈음에는 그것도 제법 숨이 찬 운동으로 그를 압박한다. 고향집 장독대 옆에 묶음으로 피어 있었던 대국이 오늘따라 추억으로 그의 눈시울을 적셔온다.

아래채 사랑방에서 새어나오던 할아버지의 낭랑한 시조 읊는 목소리가 시공을 넘나들며 이제 그의 것이 되어 되돌아온다. (H.P 011-267-5626)

                                                                            /서울 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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