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향에서 아름답게 늙고 싶다”

김 상 돈 씨

동향면 학선리 을곡마을 출신

현대자동차 과장(종로지점)

장수원촌초등학교 16회 재경동창회장

무주안성중학교 26회 재경동창회부회장

재경진안군민회 총무이사


사랑과 미움을 숱하게 배우면서 자신 앞에 놓인 실존의 형상마저도 그것은 허상이고 꿈이라고 부정하면서 살려하던 그런 세월이 있었다. 자신을 발전시키려하는 데는 인색하여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권위 또는 아집으로 그렇게 살려하던 세월이 있었다. 그렇게 진실성의 결여는 타인의 동의를 잃고 배척의 공간에서 그림자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역사에 80년대는 그렇게 무의미하면서도 의미 있는 세월이었다. 지금은 40이 훨씬 넘어 불혹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소위 세상에서 주목하는 386세대다.

 

1961년. 3월. 13일생 학선리 을곡마을에서 중농의 4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난다. 명덕봉 자락 마을 뒤에 새 모양의 산이 있다하여 을곡이라 불렀다던가. 하여튼 진안고을이었지만 그의 고향은 장수나 무주가 더 가까운 생활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학맥도 그쪽에 가깝다. 장수원촌초등을 거쳐 무주안성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전북대 상경대(경제학과)에 들었으니 집안의 생활이거나 그의 학업실력도 바람이 불만큼 잘못된 편이 아니었다.

80년대가 그랬다. 그냥 무식한대로 황폐된 정신으로 살아가기에는 당신의 지식인들의 행동은 양심을 뭉개는 채로 그렇게 지나치기에는 불안한 시대였다. 군부독재거니 민주화거니 이런 대칭적 언어들이 귀에 따갑게 물결치던 그런 시대였다. 최류탄을 맞아 거리에 나섰고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복학하여 학업을 마쳤고 1987년 봄에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대학을 졸업했고 그리고 은행에 취직도 하였다.

 

김상돈 그가 2년여 간의 주택은행전주지점의 생활 속에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좋은 직장을 내놓은 그의 인생의 스토리는 얼핏 옆에서 지켜보는 혹자들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가 그와 오랫동안 교유하면서 또는 작정하고 오늘 대화하여 이야기하는 동안 그 깨달은 것은 그의 생활철학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것이다.

항상 곁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그래도 그의 흔적은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언어의 대화가 아니어도 항상 마음에서 말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름다운 것도 그것이 미워 보이기 시작하면 미운 것입니다. 미운 것도 그것이 좋아 보이기 시작하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멀리 있었을 적 사모하고 서로 존경했었던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가까이 다가가며 서로를 실망하고 철없는 장난이라고 양가부모님들의 힐난과 부정에 막혔고, 이심전심에 대한 그의 신뢰는 상대에게서 멀어져 갔다. 숨어있었던 여인의 결점까지 그에겐 떨쳐버릴 수 없는 흔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인생에 바람이 닥친 것이다. 그의 운명이 바뀌는 자신의 행동을 그는 묵묵부답으로 받아들였다. 혈액형 O형이었던 그의 지금의 아내의 적극성에 지쳐 혈액형 A형의 그는 직장조차 팽개치고 잠적하고 만다. 실업자 상태였던 그는 일당 1,200원(당시)의 잡부로 전락하여 노숙과 유랑의 세월을 보낸다. 소주 반병이면 의식을 잃을 정도인 주량이었던 그가 때로는 ‘외로운 가슴에 꽃씨를 뿌려’ 어쩌고 하면서 슬프고 위안받을 수 없는 잠적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뒤돌아보는 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만이 갖고 있는 팔자소관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고향에서 자랐고 그곳에 사춘기를 보낸 애틋한 추억이, 고구마 구워먹던 사랑방의 추억이, 눈썰매 지치던 뒷동산의 추억이, 꼬리 연 날리던 마을 앞의 추억이 그리고 더 많은 추억들이 그의 목석같던 가슴에 전율같이 다가왔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렇게 그는 잠적의 시간을 마감하고 89년 11월 김재정(44, 완주동상)씨와 그의 잠적 중 태어난 아이를 안고 이번에는 세 식구가 함께 상경 길에 올랐다.

 

그때까지 그가 갖고 있었던 삶에 대한 모호한 회의와 운명에 대한 좌절감을 함께 청산하고 100만원 전세금으로 월세 6만원의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였다. 그간의 이야기야 어찌 글러서 모두 표현하겠냐만 우리가 생각하여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단 인생의 숙제로 남겨두자.

이제 그는 영업직 인생으로서의 활발한 성장기에 접어들어 있다. 직장에서는 우수사원으로 직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판매왕도 다섯 번이나 영광으로 안아봤다. 그들 부부의 재결합에 결정적 역할을 했었던 그 아이는 벌써 고3이 되었다. 그는 지금 지나간 그 무엇 때문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미로처럼 헤엄쳐 나온 그 길의 의미를 어떻게 저 아이에게 설명해줄까 하고 항상 생각한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고향에 홀로 옛집을 그대로 지키고 계시는 86세의 아버지와 몇 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다하지 못한 효도를 생각하고 목 메여 한다.

 

“지금이야 연애 잘하고 빨리 짝 찾아 가정을 이루는 것이 효도로 통하지만 당시만 해도 자식들의 연애사건은 부모님들에겐 낯도 들 수 없는 큰 흠이었습니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상돈씨. 이제 그는 나이 먹어 은퇴하면 결점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사랑이야기를 가슴에 안고 고향에 가고 싶단다. 어머니의 무덤에 고개를 숙이고 둘레에는 그가 좋아하는 코스모스를 심어놓고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란다. (H.P 011-272-7813)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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