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 진안군부군수

‘나이 들어 살 곳을 찾는다면 어디가 좋을까?’ 하는 고민을 할 때마다 진안을 떠올린 적은 있었지만 전혀 연고도 없는 진안에 부군수라는 직책으로 부임해서 7개월이 흘렀다. 7개월 동안 많은 진안군민을 만났고 대부분의 시간을 진안사람들과 함께 보냈다.

그런데 많은 진안사람들이 진안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유독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다. ‘진안 친구 망할 친구’라는 말이다. 연원을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짐작만 할 뿐이지만 이 말은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너무 쉽고 편안하게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어찌 들으면 진안사람을 스스로 비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것 같기도 한 이 말이 가시처럼 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왜 진안사람들은 서로를 ‘망할 친구’라고 이야기할까? 툭 까놓고 물어보기도 민망해 속으로만 되새기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질 무렵 의외의 곳에서 의문이 풀렸다. 바로 우리 집에서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둘째딸이 오랜만에 내려와 있었다. 반가운 마음과 오랫동안 못 본 아쉬움에 문득 ‘망할 녀석’이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망할? 망할! 순간 웃음이 베어 나오면서 오히려 감동에 젖어 들었다.

‘진안 친구 망할 친구’는 정 많은 진안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함축적인 의미로 가슴에 와 닿았다. 실로 ‘거시기’의 느낌이나 포괄성보다 오묘하며 정감 넘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헤어지면 보고 싶은 사람, 며칠 못 보면 궁금한 사람, 연락이라도 없으면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 사람이니까 ‘망할 친구’가 맞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간이나 친한 친구사이에 흐르는 사랑과 정이 진안 사람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혹 나처럼 외지에서 오신 분들은 이 말을 듣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잘 아는 중국 고사(故事)에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이야기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거문고의 명수였던 백아에게는 거문고 소리만 듣고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다.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고 말하고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구나”하면서 감탄을 보냈다고 한다. 백아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를 부수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유래된 지음(知音)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이르는 말로 애용되고 있다.

 

진안 사람 모두가 백아와 종자기처럼 끈끈한 애정으로 맺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내가 진안 사람이 된 것에 무한한 자긍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진안사람들에게도 아쉬운 점은 있다. 그것은 진안사람에 대한 자긍심이 지나쳐 외지 사람들에게 약간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요즘 진안 공무원의 대다수는 외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안에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이유는 진안에서 한잔 하다보면 ‘공무원들이 모여서 술이나 처먹는다’는 식의 야유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니 전주에서 만나 술밥을 먹는 것이 편하다고 느낀다. 일부 공무원들의 오해일 수 있으나 많은 진안 분들이 스스로 그러한 점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오해만은 아닐 성싶다.

 

이제부터는 우리 지역에서 술밥먹는 사람들을 칭찬하면 어떨까? 전주 안나가고 진안 식당에서 진안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삶의 무게를 나누도록 권장하면 어떨까? 진안사람이면 어떻고 외지인이면 어떤가. 가벼운 술주정은 못 본 체 해주고, 늘상 있는 험담은 못 들은 체 해주고, 옆자리 웃음소리가 크면 더 크게 웃어주면 어떨까?

그런다고 지역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거나 지역 체면이 구겨지거나 진안이 술판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진안에서 일을 하고, 진안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을 ‘망할 친구’로 삼아 힘을 북돋아 주고 진안사람의 사랑과 애정을 나눠주자. 진안에 사는 자 어느 누구도 망하지 않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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