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쁜 세월, 잊을 수 없는 인생

김 춘 기 씨
정천면 갈용리 교동마을 출신
고양주방냉동 대표
재경정천면향우회 부회장
재경진안군민회 참여부회장

황새목재에는 초빈이라하여 시신을 3년동안 두었다는 초막이 있었고 노루목재의 목에 해당되는 국사봉은 추억의 한 곳으로 지금도 그들의 향수의 대상이다. 남산에는 남산소가 있어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고향의 젖줄이었다. 심은지 200여년 가깝다는 가마소 옆의 느티나무는 오가는 고향사람들의 쉼터였고 박주줄이 있어 임진왜란때 마을사람들이 이 굴에 피난하였다고 전설처럼 전해온다. 출렁대는 용담호의 작은 물결을 지켜보며 김춘기씨의 얼굴에도 판문처럼 향수가 스쳐간다. 그렇게 고향을 추억하는 그의 얼굴에는 잃어버린 고향의 향수가 그만큼 더 크다. 잊을 수 없는 그 고향이 밤마다 찾아온다. 지금은 나이 먹어 꿈 속의 고향 나들이가 더 크단다.
1939년 7월에 태어났다.
정천초등학교를 마치고 정천중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어린시절을 고향의 마을 교동에서 4H활동에 정진한다. 당시 시대의 흐름이 그 또래의 사람들이 그랬었던 만큼 4H구락부의 회장으로 농촌문제에 심취되어 있었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박동혁이나 채영신의 영상에 가려서 마치도 자신들이 그들인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고향의 소년소녀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밤이면 사랑방에 모여 야학방을 지키면서 그렇게 꿈에 젖어 있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3년동안 입대하여 제대하고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현실적인 나이에 이르자 자신의 앞날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더란다.
또 다른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꿈에 대한 회의였다.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꿈의 먼 미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손바닥만큼 작은 농토이거나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현실적 의미가 농촌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었음을 깨닫고 느끼게 되자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에 빠져갔다.
현실문제가 소설이 아니었다. 자신이 박동혁이 될 수 없음을 두려워 졌다.
돈을 벌어 다시 고향에 돌아오리라.
1966년 봄. 고향을 떠난다. 차비만 달랑 들고 상경 길에 올랐다.
고향사람들의 모두가 그랬던 것 처럼 그도 그랬다.
그 고생이야 말로 다해 무엇하겠는가. 지금은 웃으면서 김춘기씨는 그렇게 자신의 60년대를 회고한다.
활부회사 직원으로 수금사원으로... 국제전광의 수금사원으로 자전거를 타고 하루 몇십리인지 몇백리인지 서울거리를 누빈다.
가평지사, 의정부 지사 등 그렇게 3년의 세월을 보낸다.
실길동에 영진석유를 어렵게 창업하고 하숙집 아주머니의 친절한 배려로 김계운(담양출신) 여사와 중매결혼하여 의정부에 보금자리도 꾸미고 지금은 1남1녀의 자녀도 두었다면서 그는 창밖의 허공을 본다. 지나간 세월과 돈 벌어 고향에 돌아가 농촌의 발전에 헌신하겠다고 생각했었던 그 소년시절의 꿈이 이제 정말 꿈으로 끝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지금은 수몰되어 용담호에 잠겨있는 고향의 뒷동산이 더 그립단다.
그후 그의 사업들은 그리고 그의 타향살이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고 나전칠기공예품을 취급하는 영진공예도 창업하여 잃어버린 소년의 꿈 대신 새로운 꿈을 안고 도약을 하고 있었다.
마흔한살 적이던가. 그 혹독한 80년대의 석유파동으로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던 그 세월의 바람 속에 그는 쓰러진다.
노숙자로 전락하고 타락의 세월을 그도 휘청거리면서 그렇게 보냈다.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일념으로 재기를 꿈꾼다.
한톤반 화물차에 사기그릇, 옹기그릇들을 싣고 5일 장을 찾아서 전국을 헤맨다. 충청도가 따로 없고 강원도가 따로없이 어제는 서산으로 내일은 메밀꽃의 고장 봉천장도 다녀왔고 가다가 지치면 가까운 절에 들려 자신의 지나간 세월들과 닥쳐올 운명에 대한 회한을 빌어보기도 하였다.
인천에서 시작했었던 함바식당도 주안역에서 경영했었던 가든식당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15년전 시작한 오늘의 주방냉동사업으로 지금은 조금씩 안정된 자신의 생활을 다시 찾았다. 숨가쁜 세월이었다. 잊을 수 없는 인생이었단다.
“길을 가다 보면 중도 보고 소도 본다네. 한평생을 살다보면 후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네. 열사람 친구 사귀지 말고 한사람 적을 두지말게.”
우리의 고향사람 김춘기씨. 지금 그는 어머니가 남겨주신 이 교훈을 마음에 금과옥조로 간직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수몰되어 없어져간 고향집의 추억속에 때로는 축축해진 눈시울을 감당할 수가 없다. (H.P 011-243-8924)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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