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올 겨울엔 도서관이나 파먹을까?’(3)

▲ 지음 : 오쿠다 히데오 옮김 : 이영미 출판 : 은행나무
두어달 전에 서울의 손녀딸방에서 잘 때 잠이 안와 집어든 책이다. 너무 재미있어 중간까지 읽고 못내 미련이 남아 진안공공도서관에서 다시 찾아냈다. 또 웃고 싶어서.
32살인 세이지는 조폭의 중간보스다. 대학시절 검도를 했던 그는 의협심에 대한 동경도 있었고 자신이 다혈질이라 생각해서 별 고민없이 이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성공도 했다. 그런 그에게 요즘 날카로운 것만 보면 기겁을 하고 가슴이 뛰고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 버리는 증상이 생겼다. 조폭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는 근처의 신경과를 찾아 간다.

신경과 의사 이라부는 의사같지 않은 외모를 가진 거구의 의사다. 그는 세이지의 이야기를 대수롭게 들으며 대뜸 커다란 주사를 들이댄다. 비타민이라며. 거부하는 세이지를 몸으로 눌러 버리면서. 조폭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으니 세이지는 도리가 없다.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끌리듯 다시 찾아갈 뿐 아니라 경쟁파 조폭과 대면하는 자리까지 그를 데려 간다.
서커스인 부모를 둔 공중그네의 명수 고헤이. 그도 요즘 들어 자주 상대의 손을 놓치고 곤두박질치는 실수를 연발한다. 그 원인이 새로 짝이 된 우치다의 고의적인 캐치미스라 믿는데 단원들은 그를 쉬라며 병원을 권한다. 그가 찾은 의사 역시 이라부. 이번에도 이라부는 환자보다는 서커스에 관심이 더 많다. 서커스장을 찾은 그는 막무가내로 공중그네를 배우겠다며 연습을 시작한다. 결국 그는 공중그네를 공연을 했다. 회전은 실패했지만.

학부장인 장인 덕에 안정된 교수 구라모토는 요즘 들어 대중앞에서 장인의 가발을 벗기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손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그이 동창인 의사 이라부는 그런 그를 도와 교묘한 장난질로 기어이 가발을 벗기고 만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장난질- 육교에 붙은 金王神社(곤노우 신사)의 王자에 점을 찍어 金玉(불알이라는 속어)을 친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재밋는지 ㅋㅋ. 여자애 치마들추기, 고무줄자르기 같은 악동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구라모토는 그 충동에서 놓여난다.
베테랑 투수인 신이치는 제멋대로 구르는 공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어깨가 삐었다는 둥 둘러대 감추지만 결국 그도 이라부를 찾는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이코는 새 작품을 쓰다말고 전에 쓴 작품을 뒤진다. 이건 어디선가 써먹은 이야긴데… 인물설정이나, 배경, 대사도 .
이런 강박증은 급기야 구토증으로 나타나고 이라부를 찾은 그녀는 팔리지 않았으나 열정을 다해 쓴 작품 ‘내일’에 대한 분노를 찾아낸다. 인기라는 괴물에 질질 끌려가 정말 쓰고 싶은 작품을 쓰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능력있는 신인작가의 출현으로 밀리는 자신에 초조해 하는 자신을 부인하고 싶다. 자본주의적 소비재가 되어가는 구조에 끌려다니면서 억압받은 작가적 자존심이 구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번에도 의사 이라부는 자기도 소설을 쓰겠다며 그녀를 괴롭히지만 그런 그에게서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보는 사이 그녀의 구토증은 사라진다

위에 나열된 인물들은 의사 이라부를 찾는 현대의 신경증 환자이다. 우리 안에 감춰져 있는 언제 돌출될지 모르는 병인들이다. 그 참모습들- 약하고, 추하고, 불안한- 은 불쑥불쑥 어떤어떤 이름으로 정형화된, 가면을 쓴, 나를 들쑤신다. 성공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오고, 그렇게 성공한 뒤엔 그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완벽해야 하고, 그래서 다치고 외로운 또 다른 나의 눈물을, 떨고 있는 작은 어깨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조바심치는 우리들.

“화가 나는 원인을 밝힌다구요?”
“그렇지, 원인규명과 제거. 신경의학의 기본이지.” 호오,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하네. 아이코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게 일이면 그만 둔다. 이사를 간다. 대인관계라면 눈앞에서 상대를 사라지게 만든다” 이라부가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독약을 먹이고 싶으면 약 이름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지 에헤헷” 잇몸을 드러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이봐요, 아이코는 힘이 쭉 빠졌다.

소설이란 설명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끄덕이게 하는 책.
유머같이 좋은 약이 어디 있나. 머리 아픈 날 가볍게 읽어볼 수 있는 책. 그리고 거기서 빼꼼히 숨은 나를 만나게 하는 책. 책을 덮으면서 자신이 치료받은 것 같은 후련함을 갖게 하는 책이다.
군청을 ‘굿청’으로, 고추축제를 ‘고충축제’로, 진안신문을 ‘지난신문’으로 붓칠 한 번 해봐? 컴컴한 밤에 페인트통에 붓 하나 담아 들고 두리번 살피며 간판 앞으로 가는 나를 상상하며 혼자 실실 웃고 다니게 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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