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올 겨울엔 도서관이나 파먹을까?’(9)

▲ 지음 : 이덕일 출판 : 김영사

역사서술은 산을 묘사하는 것과 흡사하다 여름산은 푸르고, 가을산은 붉게, 겨울산은 희게 보인다. 그러나 여름 산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그 푸른 산이 사실은 수 백 가지의 색색으로 빛나고 있음을-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는 햇빛의 변화와 보색의 작용으로 시시각각 다양한 표정이다. 왕과 사대부의 표정도 필요하지만 중인도 노비의 표정도 필요하다. 역사의 표정이 하나일 때 그리고 그 하나가 전부라고 인식될 때 혹은 인식을 강요받을 때 역사는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흉기가 된다.

역관이 사료에 기록되는 것은 고려말 충렬왕 때 ‘통문관’을 설치했다는 기록부터다. 중국어를 교육시켰다고 나오지만 실제 급한 것은 몽고어였다. 그렇게 시작된 역관은 6 개 국어를 배워야할 만큼 번창하기도 했다. 인용된 세계 최고의 중국어학습교재인 ‘노걸대’는 가상의 현장을 꾸며가며 통용되는 화폐단위, 물가, 판매술등을 구어체로 꾸며져 오늘 날의 회화교재도 무색할 정도다.

박지원의 소설로 알고 있는 ‘허생전’은 소설이 아닌 실화로 허생에게 만 냥을 선 듯 내어준 이가 바로 변승업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재벌의 원조가 되겠다. 그가 본 것은 중하게 여긴 것은 사람이었다. 오늘날의 재벌도 그러할까? 사람이 소비재가 아니고 말이다
조선은 해마다 명나라에 조공을 받쳐왔다? 인삼도 바치고 쌀도 바치고, 심지어는 처녀도 바치고? 이 때 조공은 큰나라에게 빼앗겨야 하는 우리 피땀으로 만든 생산물이며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았다. 조공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국제무역이었다는 것을. 명과 일본사이에 있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만들어준 천혜의 중개무역이었던 것. 명에게 파는 말의 값은 우리가 조정할 수 있고 선금을 받는 이익많은 품목이었고 일본의 은은 그 무역의 달러였던 것.
사대부들은 상업을 천하게 여겼지만 들여오는 물품의 소비계층도 바로 그들이었다. 이런 모순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오는데 역관들이 들여오는 사치품을 앞 다투어 사들이면서 역관들이 이익을 남겨 재산을 모으는 것을 비난했다. 불량식품, 사기제품, 매국기업을 비난하면서도 불매운동 못하는 우리의 피가 어디서부터 왔겠나.

이런 명분에 집착했던 사대부의 닫힌 사고체계는 청, 일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재미를 보던 호시절이 지나 청, 일이 직접교역을 시작하게 된 것도 모르고 그 때문에 장사가 안돼 폐업하는 상인이 속출하는데 기껏 한다는 짓이 상인의 수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 발표나 하고. 뒷북행정의 원조가 어드메서 시작됐나 혔더니. 일본의 은의 유입이 줄어들면 일본에게 더 매력적인 상품을 개발해 팔아야 하는데도 은을 많이 소지하면 목을 벤다니-
역관과 상인은 뭐 끓는 곳에 파리 꼬이는 것 처럼 이익있는 곳에 비리 생기기 마련이어서 숱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중인집안의 ‘장희빈’은 들먹이고 넘어 가자. 장여인이 연상되는데. 흠흠
역관 김지남. 숙종 때 청나라가 국경을 정하려 오자 함께 한 사대부께서는(이름 밝히지 말자 다 같으니까) 청의 관리가 ‘ 길 험하고 나이 많으니 오지 말라’ 니 끝까지 복지부동인데 아들 김경문과 함께 백두산을 올라가 일일이 따지고 밝혀 백두산 천지 북쪽을 청의 경계로, 남을 조선의 경계로 확실하게 그은 애국자들이다. 경기도 고양시에 그 묘 있다니 기억해 둘 일이다.

그 뿐이 아니라 김지남은 당시 세 나라 사이에 국가기밀이었던 화약제조법과 원료를 알아내 화약을 제조하기도 했는데 그가 제조한 화약은 10년이 지나도 습기가 차지 않을 정도로 좋은 기술이었다.
역관은 자주 해외를 나가다 보니 변화의 흐름을 먼저 깨달아 식견이 높았고 재산 또한 많아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천주교의 씨앗을 발아시킨 이도 역관 최인길이라 하겠는데 밀입국한 중국인신부 주문모에게 숙소를 제공하다가 수색 당하자 그를 도피시키고 중국인신부를 가장했다가 장살당해 죽었다. 역관이었으니 가능한 일.
역관 오경석은 청과 프랑스 사이의 편지를 빼내어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고 모아둔 재산으로 책을 만들어 새로운 사상을 펼치려고 하였다.

대표적인 두 사람 중인 출신 오경석과 의관 유홍기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고 체제수용에 적극적이었으니 자신들의 신분으로는 사대부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알고 사대부 박규수에게 위임한다. 아마 이때부터 역관이 외교관으로 분화되는 시기인 것 같다. 상인은 재벌로 가고.
고종 6년, 박규수의 북촌 제동 사랑방에서는 양반자제들- 김윤식,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박영교, 서광범, 유길준, 김홍집 들을 모아 교육시키는데 그들이 개화파들이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그 자금을 쓸 줄도 알았던 것이다. 우리 눈앞에 있는 재벌들 이런 것도 따라할까? 그러지 말고 미리미리 환원하면서 살아주면 우리도 부자 존경할 텐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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