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전창석
전 창 석 씨
진안읍 군하리 출신
환경연합양천지회 자문위원
개인택시/모범택시양천지회 자문위원
신강베드민턴클럽 회장
진 마 회(鎭 馬 會) 회장

처음만난 필자가 마치 10년 지기라도 만난 듯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였던 그도 고향 이야기에 미치자 금방 표정이 굳어지는 것은 그만큼 그가 고향에 대한 애증의 세속에 평생을 묻고 살아 왔음이리라.
8월이면 다가 선 그의 한 회갑의 연륜을 바라보면서, 그가 평생을 그리워하면서 밤마다 꿈길 따라 나섰던 고향 길이라 했다. 철들기 그 전에 보내드린 어머니의 잡혀지지 않는 그 모습을 찾으려고 밤새워 헤매다가 새벽녘 먼데서 들려오는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쫓기듯이 일터에 나서기가 몇 번인지 헤일 수가 없다고 그랬다.
진마회(鎭馬會)는 진안과 마이산의 머리글을 따서 만든 양천구에 살고 있는 진안사람들의 모임이다. 남여23명이 매월 모여서 고향을 이야기하고 또 자신들의 일상을 이야기 하면서 고향 길을 오간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를 즐거워하면서 하루를 흐뭇해한다.

지금 전창석씨는 개인택시의 사장으로 운전기사로 떳떳한 자영업자로 세상걱정 없는 생활로 유유자적하고 있지만 그의 지난날의 이야기들은 그리 편하지만은 못했단다. 그가 까마득히 기억하고 있는 그의 가세는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까지만 하여도 상당히 넉넉한 그런 것 이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의 가세는 그의 어머니가 그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중병으로 자리에 누우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옛말에 긴병에 효자 없다고 했단다. 그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원비로 또 어머니의 병 수발로 논을 팔고 밭을 팔고 그렇게 가세는 기울어 갔고 그것이 바닥 날 즈음에는 어머니도 세상을 뜨신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항들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철없었던 시절을 그는 그렇게 보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세월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풍비박산이라 하였던가, 그의 4남매는 뿔뿔이 흩어진다. 그는 가산을 정리한 아버지를 따라서 외가가 있었던 백운 면에 머문다. 자신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 즈음 이였다. 어머니의 죽음 의미를 그가 깨달으며 밀려오는 슬픈 아픔을 가슴에 안은 것은 사춘기가 왔을 그때였다.

삶이라는 것은 한 조각의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다. (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이라는 것은 한 조각의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 (死也一片浮雲滅)

가끔씩 그는 지금 나이 먹어 서산대사의 이 생(生)과 사(死)에 대한 영혼의 소리를 들으면서 죽음에 대하여 초연하고 담담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그의 표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보니 그의 말처럼 항상 맑다. 밝다. 그 속에 스며드는 어두운 그림자는 어쩌면 간직하고 있는 그의 아픔 일게다. 열네 살, 고향을 떠난다. 군청 옆 그가 살고 있었던 그 집이 시공을 뛰어 넘어서 아물아물 그의 기억에 잘 잡혀오지 않을 만큼 많은 세월이 비켜갔다. 생각하여 보면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고향인데 그렇게 덧없이 세월이 흘러 간 것이다. 암울하고 참담한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잃어버린 둥지를 찾아서 헤매고 헤매면서 방황하던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허공의 빈자리를 움켜잡으려고 발버둥치던 그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고향을 떠나서 어디로 갈 것인가.

정월 보름날을 기약하며 흩어져 간 그 형제들을 생각하며 그래도 먼저 객지풍산 상경한 형을 찾아 서울 도림 동에 여장을 푼다. 그의 형은 먼 일가 벌 되는 이가 운영하고 있었던 철공소에 취업하여 있었으나 그는 그 일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저것 따질 그런 처지는 아니었으나 그냥 거기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사업수단을 여기 저기 설파하고 어찌어찌 벌려놓은 구멍가게를 문 닫는 데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 그것이었다.
열아홉 살. 군에 지원입대 한다. 월남전선에 지원하여 참전한다.

거안사위(居安思危). 사측유비(思則有備). 유비무환(有備無患).
당시의 월남파병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저항과 반대를 안고 이루어 졌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생겨났으므로 대통령이나 정부도 많은 관심과 대책을 그 쪽에 갖고 있었고, 그리고 파병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의 속내는 가난한 그 시절의 생명과 교환하는 수단일수도 있었다. 사실은 그랬다. 첫 전사자가 발생했을 때 야사(野史)처럼 또는 전설처럼 떠도는 애환 하나를 들려준다. 전라도 어디 출신의 장기복무 육군하사였던 그 전사자는 고향에 머슴살이 하는 형이 하나, 두형제가 함께 머슴을 살았는데 입대하여 장기복무에 지원한 그 아우 월남전쟁에 참전하여 돈 모아, 고향에 논, 밭 서마지기 작만하고, 형님 장가보내는 것이 소원 이였단다. 그 전사자의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대통령의 지시였다던가, 그 소원은 이루어 졌으나, 바로 그것 이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 주는 전창석씨의 그 의미는 거안사위, 사측유비, 유비무환의 그 의미를 자신의 실생활에서도 항상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제대하고 한창 나라의 건축 붐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는 동아건설의 중장비 요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서의 4년을 잊지 못한다. 인생의 황금기를 열사의 사막에서 오직 삶을 위하여 땀 흘리던 시절 이였다. 철없었던 그 시절 돈으로 돌아가신 것만 같았던 그 어머니의 한을 풀어가는 심정으로 그는 일했다. 그리고 돈도 모았다. 아내 송경숙(서울. 53세)씨와는 30세에 결혼하여 남자아이 둘을 얻었으니 그도 참 고마운 일이 아니냐고 웃어댄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 손꼽아 헤어보니 / 고향 떠난 몇 십 년에 / 청춘만 늙어.

유성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저 유행가 소리는 틀림없는 자신의 그것이란다. 개인택시(모범운전포함)운전 30여년의 그 세월은 보람과 형극의 그 길이였다. 그렇게 떠나간 어머니를 잊을 수 없어 한달에 열 번 있는 휴무일에는 노인봉사에 나선다. 환경 보호운동에도 앞장선다. 하천의 청소에 나선다. 등굣길 학교 앞 교통정리로 어린아이들의 보호에 앞장선다. 마을 주변 산과 거리의 청소에도 한목 거든다. 그가 있는 곳에 환경보호와 뒤 따르는 봉사활동은 명랑한 시민운동의 기본이다. 그가 의도하는 목표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고향사람 전창석씨, 기억조차 못하던 그 시절 엉겁결에 떠나 온 그 고향, 잃어버린 그 고향을 찾아서 우리의 곁으로 다가온다. 마이산이 그립고, 마이산 높이 올라 내려다 본 용담댐이 즐겁다. 가슴에 묻어 두었던 그 향수가 두근거림으로 트림한다.(H.P:011-725-7696)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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