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올 겨울엔 도서관이나 파먹을까?’(10)

▲ 지음: 윤후명 출판: 문학동네
어이, 운정, 서울 올라갈 때 전화 한 번 삐죽 하고 내려올 땐 소리없이 왔다네. 그게 다 조급해서였지 집에 손님이 오셨다지 않나. 그게 누군가 하면-
‘헌문 달아 새집 지은’ 게 우리 집이란 걸 자네도 잘 알지. 다녀도 가셨고. 그 문짝중 수문장격인 현관문이 지난번 안개바람 자욱한 날 기어이 떨어져 나갔다네. 도리 없어 못질해놓고 옆문으로 드나드는데 그 사이로 봄이 오고 있을 줄이야-

그 봄 마중하려 급하게 내려왔다네.
아직 남은 눈이 하얀데 그사이로 삐죽 고개 디미는 꽃을 보면 가슴 떨리며 눈물 나는 것은 그 꽃이 모진겨울을 인내해주어서만이 아니라네. 보는 내가 그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 꽃은 내게 와서 특별한 그 무엇이 되는 것이지. 시인의 마음이 되어지는 것이지.
바람 잠자고 햇살 따사로운 그러나 아직 겨울인 집 마당에 서 있는 마른 대궁 들여다보다가 아얏! 했다네. 거기 꽃눈, 잎눈, 카운트다운 기다리며 눈 살포시 감고 있지 않은가. 내 다가섬에 그 감긴 속눈썹 살짝 치켜뜨는 환각에 가슴 데인것이지.

솜털처럼 뽀얀 산 사이로 얼핏 노란얼룩 보이거든 그게 생강나무인줄 아시게나. 생강나무는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동백꽃으로도 그려졌으니 호적에 올라있는 이름말고도 아명 가진 이 있는 것처럼 고개 갸웃거리지 마실 일. 그러고 보니 우리동네 배나무 집 아저씨도 동백나무여 하셨지.
이름을 모르고 본다면 그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하고 말 것이나 그 이름 알고 불러 보면 행여 그 꽃 대답 들을까 하여 키 낮추게 되니 꽃 이름 하나 아는 것은 이렇게 겸손을 배우게 되는 일도 되지 않겠나.
나는 시골에 와 살면서부터 봄을 사랑하게 되었다네. 도시에서 살적에는 봄이 싫었다는 말이지. 왜냐고 물어 주게. 도시의 봄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나? 여인들의 옷에서 오지 않던가. 나도 봄소식을 전하는 우체부가 되어 봄빛 가득한 옷 떨쳐입고 거리로 나서지. 그러나 거리엔 바람이 불어 살갗에 소름 돋우고 가슴팍께로 마구 손 집어넣어 희롱해대지. 얇은 치마 걷어 올리지. 그런 봄이 싫었다네. 그런데 시골에 살다보니 도시에서 살 때 보다 봄이 더 기다려지는 건 그깐 옷 따위로 맞는 게 아니라 알몸으로 맞게 되고 봄이 오는 경로가 다르더란 말이지.

꽃눈 잎눈 달고 있는 게 역시 개울가의 생강나무더라니까. 명자나무도 가득 망울 봉오리 달고 있고.
봄에는 왜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줄 아나. 그리고 봄은 왜 봄 인줄 아나.
긴 겨울 눈에다라도 꽃을 붙여 눈꽃이라 불러가며 기다리는 우리 중생들을 위하여 먼저 보라고 꽃부터 보여준다 해서 봄이고, 꽃은 먼저 피는 게고.
봄에 하는 자연공부는 나무로는 생강나무, 산수유, 목련, 꽃은 복수초, 양지꽃, 좀 더 봄이 익어가면 국수나무, 광대나물, 냉이 꽃다지, 개불알풀 주로 꽃이름으로 시작했던 게 기억나는군. 큰나무가 잎 피우기전에 앞 다투어 피워 올리는 꽃망울은 우리보기엔 아름다워도 저들에겐 눈물겨운 생존과 자손남기기의 노력이라지.
1월엔 우린 변산으로 나무보러 갔다네. 내가 사는 진안은 겨울이 길어 눈꽃 아니면 꽃보기가 어려워 남쪽으로 갔더니 거기 후박나무가 바닷물 들어오고 나가는 해안끝자리위에 숲을 이루고 있더군. 매끈한 줄기며, 두툼하고 윤기 나는 잎들이며, 거기 바다물 들어올 적마다 실어다 주는 먼데 소식이 못내 궁금해지더군. ‘너도 기다려 들어봐’ 하는 대답에 어깨 한 번 으쓱 하고 물러나왔지. 그런데 그 후박나무란 이름을 많은 사람들은 일본목련에다가 붙이는걸 알면 기분이 어떨까? 싶어지더군.
그의 글은 꽃글이었네. 꽃이야기를 쓰다보니 꽃글이 된거지. 향싼 종이에 향내 나고 멋 싼 종이에 멋내 난다는 말. 자네도 알지 않나.
그러니까 꽃 이야기를 쓴 윤후명이란 시인은 꽃글을 쓸적에 이미 꽃심으로 물들어 있었다는 말이지. 부럽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도 그럴 수 있다네. 그깐 꽃이름 하나 아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구, 꽃을 대하는 마음이 사랑스럽고 어여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네.
이름을 안다는 건 관계맺기의 시작이니 꽃이름을 아는 일 하나가 곧 우주를 아는 일이 되고 우주로 다가가는 첫걸음이 되는 일이 아닌가. 윤후명이 들려주는 ‘꽃의 기침소리’ 꼬옥 들어보시게나. 가능하면 손에 쥐고 꽃보러 다니시면 더욱 좋고. 이야기 실어 만나면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니. 나도 올핸 깽깽이풀 꼬옥 만나러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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