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자아상실(自我喪失)과 좌절(挫折)은 짙은 허무주의(虛無主義)의 바탕이다. 허무주의(nihilism)는 냉소주의(冷笑主義)의 변형일 뿐이므로 냉소주의에 대한 처방이란 단야(丹冶)일 수밖에 없다. 단야는 대장간 화덕 속에서 쉬임없는 풀무질로 새파랗게 핀 숯불에 이글이글 달구어진 무쇠를 이름이다. 단야는 열정이고 열광이고 정신적 신바람이다. 부조리(不條理)는 인생의 무의미, 무목적, 충동성을 총칭한 표현이다. 실존주의 문학자 카뮈(A.Camus)는 인생의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데에 진실의 인생, 즉 실존이 얻어진다고 했다. 실존주의 부조리 사상은 기성의 지성과 도덕을 일단 포기하고 외계와의 단절 밑에 모순된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부터 출발한다. 현대문명에의 의식과 거기에 대한 반항을 통하여 적극적인 생존방법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정신병동(精神病棟)에 입원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 병문안 온 한 친구는 병원 앞 물이 말라버린 연못가에서 낚시질하는 친구를 발견하고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 친구는 연민의 마음으로 친구 곁에 다가서며 아주 진지한 표정을 다하여 목소리를 줄여 묻는다. 그는 정신병 환자니까.
「고기가 많이 잡히냐?」 마른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유유자적하던 그 친구가 힐끔 병문안 온 친구를 올려 다 보다가 정말 불상하다는 듯 대답한다.

「야, 이 미친 친구야, 마른 연못에서 무슨 고기가 잡히겠냐?」 위로하려 말을 걸었던 그 친구 할말을 잃을 수밖에. 과연 이 시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는 누구란 말인가.

서울에 취직되어 살고 있는 아들의 직장을 찾아서 고층빌딩의 숲 속을 헤매고 있었던 산골 출신 아버지 농부가 정문 근무자의 제지를 받는다. 아버지 농부는 처음 보는 높고 높은 이 빌딩의 위력에 질려서 서성대고 있었는데 제복 입은 이 근무자의 위세에 또 한번 당황하고 있었던 터였다. 아버지 농부의 모습을 훑어보던 수위 아저씨가 슬그머니 한 꾀를 생각해 낸다. 허우대가 멀쩡한 이 시골 사람의 등을 처서 돈을 좀 벌어 보자는 생각에 미친것이다.

「당신 아까부터 빌딩을 자꾸만 올려다보는데 한층 구경하는데 200원이니 꼭대기 까지 모두 허락 없이 구경하였으니 12,600원을 내시구려,」 아버지 농부가 가만히 생각 해 보니 꼼짝없이 당했다 싶었다. 서울 올라올 적 유식하기로 소문 난 동네이장이 서울은 아직도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더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아니요, 어느 사이 저 높은걸 다 구경 했겠오. 아직 15층밖에 못 봤오. 엣소, 3,000원 여기 있소.」 아버지 농부는 경우 바르게 돈을 던져 주고는 쏜살같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아버지 농부 왈, 「서울놈 덜 별거 아니드만, 63층을 다 봤는디, 까맣게 속드라고.」

적반하장(?)일가, 과연 누가 바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현대의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실재(實在)나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 과 가치까지 부정하는 무(無 )의 세계까지 와 있는 것이다.
이범선의 오발탄은 이런 맥락에서 6.25이후 암담한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짙은 허무주의를 바탕에 깐 그런 우리의 이야기였다. 잘 못 발사 된 탄환은 바로 우리들이다.

어머니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가자!」를 재촉한다. 음대생 시절 꿈 많던 아내는 생활에 찌들어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간다. 동생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자원입대 하였다가 상이군인이 된다. 여동생은 양공주가 되어 수모를 당하면서도 병원비를 낸다. 어린 딸은 영양실조에 걸려 울어댄다. 아, 아, 이보다 더 한 암울함이 또 있을 것인가, 우리 역시 허허 벌판에 서 있는 심정으로 「가자!」를 외칠 수밖에 없었지 않겠는가.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린 그들은 오늘도 우리 곁에 너무나 많이 흩어져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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