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잊은 적 없는 내 고향

▲ 정종기
정 종 기 씨
부귀면 오룡리 오산마을 출신
(주)KT익스프레스/동방통운 대표
불 사 조 렉카 (진안) 대표
재경부귀면향우회 총무 역임
재경진안군민회 부회장

정종기씨, 그의 고향 오산부락은 해발 548M의 벙우재 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의 서북쪽 봉암리와의 경계에 있는 이 산을 어릴 적 형들을 따라서 오르내리던 그 자연적 기억으로부터 정종기씨의 고향생각은 시작된다. 어릴 적 그야말로 코흘리개 시절 그 추억은 산을 오르고 골짜기를 넘으며 멀리 퍼져 나가는 메아리의 되돌림 소리를 들으면서 자연 속에 묻혀 사는 미개인(원시인)의 그것을 닮으면서 속세의 그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그 생리를 익히면서 자라왔다. 인간의 자유가 대기 속의 산소처럼 그리워 오는 그러한 인간적 기운이 우리의 신체 속에 가두어져 있었지만 때로는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존재를 자연과의 일체의 상태로부터 분리되는 방법을 배운다. 아주 오랜 역사 속의자연과의 연결된 또 다른 자유를 인간은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정종기씨 그도 가끔씩은 어머니를 따라서 가까운 산촌의 오솔길 가 바위에 비둘기 집처럼 걸쳐져 있는 암자의 바람결에 흔들리는 핑경 소리를 들으면서 그 원시적 자유의 의미를 익히기도 하였다.
금오망란혈(金鰲望卵穴)의 오산마을 중농의 가정에서 정종기는 아버지 정성규씨와 어머니 최순애씨의 4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난다. 6남매의 중간에 있었던 그는 눈에 띄게 특별함 없는 지극히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향리의 부귀초등학교를 그렇게 마친다. 비교적 중농가의 그의 집안이 입에 풀칠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드래도 위로 형제들의 그것이나 그 형편이 그가 상급학교의 진학을 고집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일찍 간파한 그는 익산의 남성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고 당시 삼천리 자전거 익산대리점에 아르바이트로 취업하는 지혜를 보인다.

그의 집안은 일찍부터 부모님이 불교에 귀의 했다기보다는 그에 익숙해져 있었던 시골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그런 불자집안 이였다. 따라서 그의 나머지 형제들도 자연스럽게 불교에 입문하여 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애초부터 자신의 자유로운 자연의 미개인(未開人)을 느끼고 거기에 함몰하여 빠져든 것도 어쩌면 그의 성장과정의 시작이 그렇게 영향을 끼쳤겠으나 어쩌면 그것도 타고 난 운명 이였을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악(惡 )한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틈도 없는 그의 얼굴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그의 표정은 그가 힘주어 강조하는 그 원시인임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인간을 속박하고 있었던 모든 풍속을 그가 일찍 벗어나는 지혜를 그는 자연에서 배운 것이다.

지금의 생업에서 4년 동안 28번이나 당한 사고 중에서 죽음을 눈앞에 맞은 극단의 그 사고를 몇 번 겪고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일찍 익혀 두었던 자연과의 투쟁에서 얻어 진 결과였다고 그는 확신한다. 부모님들이거나 형제들, 그의 모든 집안이 이렇게 불교식 전통의 가족적 테두리 속에서도 그가 유독 예수교인으로서의 입지에 그의 위치에 흔들림 없이 지켜 내면서, 그 일족들과의 사이에도 불화 없이 공존의 길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차라리 그의 원시인적인 노력의 결과도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물일곱에 같이 하여 세 아들 낳고 불평 없이 잘 따라, 잘 견디어 준 그의 아내(임춘도권사. 김제출신. 53세)에게 있음을 흡족한 마음으로 자랑 할 수 있다고 했다.

정종기씨는 그렇게 6년간의 형설의 공을 쌓고 익산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한다. 6년간의 각고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학교를 마치면서 그는 고향에 자신이 경영하는 자전거 대리점을 갖는다. 그것은 이제 그가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굴레에서 압박 받는 미개인의 세계를 탈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였다. 그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그 미개인의 의미는 사전적 의미의 낱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영혼의 흔적으로 찾아가는 미지의 공간을 의미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의 숨겨진 진한 철학이고 속세의 불안과 지식의 빈 공간 앞에 허망한 세상의 체계적인 자유의 노예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자유를 찾아서 자연을 방황하던 그의 영혼 속에 불어 닥친 자유의 포기 의식은 그가 인간의 성숙에 한발 타협하는 본질의 의미에 접근하는 계기가 된다. 파행은 어디에나 있고 그것은 어디서나 가능하다.

그의 절망은 15년의 그의 의지에 절망을 주었다. 자전거 대리점의 파산은 그의 끝없는 방황의 다시 반복되는 시작이 되었다. 이제 그의 파행은 그의 가슴속에 잊고 있었던 단순하고 더 큰 자유의 열망을 그가 깨닫게 되는 이유가 된다. 사업이 망했다는 현실 앞에 그가 수긍하지 아니하고 더 크고 높은 인생의 외침을 향하여 분연히 비상하던 그의 곁에는 항상 그의 아내가 있었음을 그는 잊지 않는다. 그의 일가는 고향을 떠난다. 애타는 가슴이야 그의 아내인들 오죽 하겠는가. 그녀는 불안을 숨길 줄 아는 총명을 갖고 있었다. 맑은 웃음으로 불안을 함께 덮어주는 아내의 큰 힘을 정종기씨는 영원하게 기억 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믿음 이였고, 소망 이였고, 그리고 그것은 사랑 이였다. 그것은 그 아내가 갖고 있었던 이 세상 진리의 승리였다고 그는 강조한다.

처음 지입 차 1대로 시작했었던 그는 3년 후 그가 지입 되어 있었던 동방익스프레스를 통째로 인수한다. 회사명을 개명하고 오늘에 이르는 그는 21층 사다리차를 비롯하여 탑 차등 눈부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고향으로의 눈을 돌려 렉카업체인 「불사조」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그는 어려운 시절엔 그 나름대로 고향을 잊지 못했다. 즐거운 시절엔 또 그 나름대로의 향수 속에 서서 고향을 잊지 못했다. 한번도 그는 고향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제 그는 고향으로 향하는 그의 신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고향에 가서도 열심히 살 것이다. 고향을 떠나서도 그는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종기 H. P ; 011-2424-011)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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