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이윤한씨
이 윤 한 씨
성수면 좌산리 출신
(주) 궁전실버뱅크 실장
세계일보 조사위원
성내1동방위협의회위원
재경성수면향우회 부회장
재경진안군민회상조회운영위원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운명과 숙명을 혼용(混用)하여 사용함으로서 그 언어의 의미와 그 뜻이 아주 불명확하게 쓰이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또한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때로는 논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것도 우리는 접하게 된다. 숙명(宿命)이란 타고 난 선천적(先天的) 특성인 불변(不變)의 명(命)을 말하고, 운명(運命)이란 변화와 바뀜의 후천적(後天的) 요인(要因)에 의하여 변하여 질수가 있는 것을 말한다. 숙명이란 타고 난 본래의 성징(性徵)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운명이란 그것이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에 의하여 인생은 얼마든지 선천적인 토대위에서 변화 될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삶은 다양한 영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천적인 것이 절대적 영향력이 없으며 후천적 요인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두 요인을 조화시키는 각자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의 몫으로 작용하는 행위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 자신의 운명을 몇 번씩도 바꾸면서 살아 온 한 인생이, 예측 할 수 없었던 숙명의 덫에 씻겨진 상처를 어쩌지 못하고 불확실성의 세상을 조용히 살아가려 애를 쓴다.

이윤한씨. 47.3.19.생.
향리 좌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동중 전주농고를 마친 후, 군에 입대하고 제대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고향의 잠업증산요원으로 일하면서, 조금이나마 고향의 의미를 가슴에 간직하고, 고향 농촌의 가난한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그 현실의 돌파구가 무엇일가 하는 고민으로 나날을 보낸다. 1973년 제대 후 당시 정부 방침 이였던 향토예비군 지휘관 요원 충원방침에 따라서 광주보병학교의 16주 보수교육을 필하고 임시소위에 임관되어 향토예비군 성수면대장으로 그가 고향을 떠나는 1982년까지 향토방위 업무에 그의 신명을 다 하였다고 말한다. 그 사이 임인순(원외궁출신)씨와 중매로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도 그 본분을 다 하였다고 그는 자부한다. 그가 이렇게 고향에 머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의 머리 속을 맴돌며 그의 가슴에 의문으로 남는 것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이 농민들의 생활은 왜 조금도 낳아지지 않고 발전됨이 없이 제자리걸음을 계속해야 하느냐 하는 것 이였다. 마을 앞 넓지 않은 저 들판을 바라보며 조금은 허황한 생각에도 젖어 보지만 그것은 어쩌면 꿈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때 많은 돈을 벌어서, 저 들녘을 모두 내 것이 되게 할 수는 없을까? 3남5녀의 장남 이였던 이윤한씨는 그렇게 항상 가난을 벗어나는 운명적 방황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하여 자신이 바꾸겠다는 원천적인 꿈속에서 그렇게 살아온다.

그는 그의 아내 임인순씨와 두 아이를 이끌고 상경한다. 180만원의 전세방에 여정을 정리하여, 창신동의 음식점 전주집을 시작으로 가락시장의 칼국수 집, 또 어디의 파전 빈대떡 집, 그의 아내와 함께 우선 먹고 살기에 전념하였던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의 호상(虎相)에 젖어지는 눈물을 본다. 그렇게 살아왔었던 그의 아내는 이제 그들이 아들 딸 다 키워 결혼시키고 겨우 숨 돌려 먹고 살만 하니까 먼저 운명을 달리 한 것이다. 이윤한씨, 그가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어쩌면 남,북극에 가서도 냉장고를 쎄일 할 수 있을 만큼의 그러한 저력으로 이 험하고 어려운 세상을 헤쳐 왔었는데, 그의 이어지는 그 숙명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한계였다. 그것은 어쩌면 신의 뜻 이였다고 그는 오열한다. 어른의 오열이 또 이렇게 슬픔으로 전해 오는 것은 처음이다.

그의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정확하게 13개월,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가 중풍으로 돌아가신지 그리고 18일,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아내가 부모님들의 그 우환(憂患)에 내색조차 못하였던 그 아내가, 오랫동안 참으로 오랫동안 참고 견디어 오던 췌장암(膵臟癌)으로 운명을 한다. 한 가정의 맏며느리의 역할을 다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하면서 남편과 두 아이를 뒷바라지 하던 아내의 살아생전 씩씩하였던 그 모습을 이윤한씨는 오늘도 눈물로 기억한다. 이윤한씨가 6급 군무원으로 21년 동안 성실하고 끈질기게 이 세상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의 아내의 내조의 힘 이였음을 그는 그의 가슴이 처절하게 아리도록 기억한다고 했다. 오늘도 이윤한씨는 아내가 남겨 주고 간 닳아빠진 성서와 찬송가를 어루만지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원래 그의 부모님이 원불교에 귀의 하셨고, 또 주위의 환경이 그러 하였듯이 약간은 기독교 불신사상에 젖어 있었단다. 그것이 가끔씩은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었는데, 아내의 투병 생활 중 교인들이 보여 준 헌신과 공로를 그는 잊을 수가 없단다. 아내의 임종(臨終) 때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로 교회에 헌신하여, 그의 아내에게 못 다한 사랑을 다 하려고 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 들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 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우리의 고향사람 이윤한씨. 씩씩한 도전으로 운명을 바꾸면서 인생의 목표를 다짐했던 그가 지금 우리 앞에 다가 온다. 아내의 한계적 숙명 앞에 통곡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다시 눈을 들어 앞 들녘을 바라보며 뚜벅뚜벅 다시 출발하는 그의 힘 찬 발길에 우리 함께 박수를 보내자.(이윤한씨H,P:011ㅡ9713ㅡ9470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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