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정류소 김영석 할아버지

▲ 오가는 손님은 거의 없지만, 주천면에 버스가 설 때까지는 꼭 필요한 일이기에 오늘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 이상하다. 기다림 방(대합실)에도, 표를 파는 곳에도 잘 보이게 붙어있었다. 큼지막한 글씨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아도 쉽게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와 김영석(84)씨에게 묻는다.
“아저씨 진안 가는 버스 몇 시에 와요?”
“네, 두 시 십분 차니까. 조금 있으면 오겠네요.”
두 시간 남짓 머무는 동안 유사한 물음과 답변을 계속 반복해 들어야 했다. 금산에 가는 사람도, 전주에 가는 사람도, 진안에 가는 사람도 모두 김씨 할아버지에게 시간을 묻고 표를 산다. 묻는 사람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 답하는 사람도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아마 40년 동안 그런 풍경은 계속 반복되었을 것이다. 주천정류소 김영석씨는 그 세월, 변변히 자리를 비워본 적도 없다. 고스란히 정류소 풍경으로 녹아 있었다.

50년 넘은 건물 아직도 튼튼
건물 외벽에 ‘주천면정류소’라는 간판과 건물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기다림 방이 없다면 그곳은 그냥 길가에 흔한 가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담배와 낚시도구 등을 판다는 표지가 붙어 있고 건물 내부도 아이들이 먹는 과자와 생활용품들로 가득하다.
계산대 노릇을 하는 야트막한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김씨 할아버지의 모습도 그냥 여느 시골 가게의 풍경이다. 책상 맞은편 천장에 달아 놓은 버스시간표만이 그곳에서 표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수선하면서도 물건이 품목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양새가 주인의 성격을 가늠하게 한다. 건물은 한눈에 보아도 꽤 나이를 먹었다. 가게 가운데 서 있는 기둥부터 천장 마감재료, 대들보, 녹슨 진열대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게 6·25 직후에 지은 건물이에요. 그때는 전쟁 끝이라 산에서 나무도 구하기 어려웠어요. 그 기둥도 일본에서 건너온 목재고 대들보도 다 리기다소나무예요. 오래됐어도 집은 튼튼해요.”
짐작은 했지만 50년은 훌쩍 넘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다시 보게 된다. 기다림 방에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평상도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다. 시골 정류소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물건일 게다.

▲ 매표소 안에 걸려 있는 버스 시간표. 하지만,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시간을 묻는다.
버스기사 식당 겸 숙소로도 활용
김씨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익산에서 병원을 하던 형님을 도왔다. 그러다 1960년 3월10일, 주천정류소를 맡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터미널과 함께 한 세월이 꼬박 47년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산하지 않았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줄고 자가용이 넘치는 지금과는 달리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는 어지간한 월급쟁이 안 부러웠죠. 사람도 많았고 돈도 됐으니까요. 지금은 헛일이에요.”
장이 서는 날이나 등·하교시간에 사람들을 좀 볼 뿐 띄엄띄엄 사람 구경하는 지금과는 분명 달랐다. 당시에는 버스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들어왔다. 그 기사들 밥도 해서 먹여야 했다. 또, 주천에서 자고 바로 다음날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차량 기사들에겐 숙소 구실도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버스에 사람이 다 타지 못해 여기저기서 고함소리도 나왔고 버스 안으로 사람을 밀어 넣느라 진땀을 뺄 정도였다. 그 당시 주천면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했다. 근처에 경관이 빼어난 ‘운일암 반일암’이 있어 지금도 여름 휴가철이면 사람 구경은 좀 하지만 죄다 자가용을 끌고 오니 그냥 차 구경만 하는 꼴이다.

정천고개 눈 치우던 기억 아스라이
“내가 정류소 운영하면서 표창도 몇 번 받았지요. 옛날에 버스 회사 사장들이 주천면에서 버스 들어오라고 하면 틀림없이 들어가도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버스정류소를 운영해 온 김씨 할아버지가 다른 일도 아니고 정류소와 관련해 표창을 탔다니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얘기를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겨울이면 눈을 치우는 것도 김씨 할아버지의 큰일 중 하나였다. 진안에서 들어오는 정천고개와 금산으로 나가는 대봉고개는 악명 높은 고개였다. 눈이 왔을 때 바로바로 치우지 않으면 버스가 들어오지 못했다. 부지런하고 일머리 정확했던 할아버지는 미리 필요한 사람들을 준비시켜 놓았다가 눈이 내리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도로의 눈을 치워냈다.

“그때야 어디 도로제설을 관에서 신경이나 썼나. 다 우리가 했지요. 내가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버스가 들어오지 못했어요. 그래서 버스회사 사장들도 운전기사들한테 ‘주천면에서 들어오라고 하면 틀림없으니까 믿고 들어가라.’라는 말을 했다니까요.”
그 시절, 버스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수단이었으니 중요성은 더 말해 무엇할까. 김씨 할아버지는 정류소를 관리하며 자신이 맡아 하던 그 일에 자부심이 아직도 대단했다. 그리고 그 자부심에 기초한 책임감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 주천정류소 기다림 방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하루의 대부분은 텅 비어 있다.
나중에 며느리가 맡았으면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 그렇게 하루종일 앉아 표를 판매하고 운행시간을 안내하는 일이 그리 녹록지는 않을 텐데 지금도 쉽사리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힘들긴 하지요. 그래도 내가 자리를 비우면 불편한 사람들이 생기니까 어쩔 수 없어요. 이거 해 봐야 무슨 돈이 되겠어요. 돈 때문에 이렇게 자리를 지키는 건 아니에요.”
아내 홍옥순(82)씨는 지팡이를 짚고 경로당에 갔다. 간혹 볼 일이 있으면 할머니에게 맡기고 자리를 비우지만 하루종일 문을 닫은 일은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밤 11시까지 하루 절반 이상을 지켜야 하는 고된 일이다. 그 야밤에 누가 있어 문을 열어놓을까 싶지만. 혹시라도 믿고 찾아 올 손님 한 명 때문이라도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김씨 할아버지의 생각이다.

“이거 내놓는다고 누가 맡아서 하겠어요. 돈이 안 되니까요. 그래도 안 할 수는 없고…. 그래서 자식들 중 하나에게 물려주려고 하는데 잘 되려나 모르겠어요.”
처음엔 대전에 살고 있는 큰아들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이미 자리를 잡아버려 맡길 수가 없게 됐다. 그래 요즘엔 전주에 살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얘기하고 있다. 아직 결혼을 안 했지만 결혼을 하면 며느리라도 출·퇴근 하면서 주천정류소를 맡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화를 마무리할 때쯤 정류소 기다림 방에서 낯선 이방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안에 시집온 외국인 주부가 고향에 전화라도 하는 모양이다. 텅 비어 있는 기다림 방에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대신 외국인 주부의 그리움 가득한 목소리만 허허롭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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