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6]
성수면 좌산리 (3) 가수마을(상가수, 하가수)

▲ 가수마을에는 세 곳에 정자나무가 우뚝 서 있다. 사진은 하가수마을이 시작되는 곳에 서 있는 정자나무
‘아름다운 물이 흐른다’는 뜻의 가수(佳水)마을은 본래 뒷산이 개가 엎드린 모습을 하고 있어 ‘복지개’라고 불렸던 마을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 앞산이 범바위라고 불리는데, 호랑이가 마을 앞에 있어 개가 엎드려 있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이 마을은 개수리라고 불리다가 명칭을 한자로 바꾸면서 뜻이 전혀 다른 지금의 ‘가수’가 됐다.
가수마을은 성수면 좌산리에서 가운데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 동쪽으로 상기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원좌산마을이 늘어서 있다.

가수마을은 다시 두 자연마을로 나뉜다. 현재 원불교 가수교당과 좌산보건진료소를 기준으로 상기마을 방향이 윗마을인 ‘상가수’이고, 마을회관이 있는 원좌산 방향 마을이 ‘하가수’이다. 하지만, 두 자연마을은 얼핏 보기에 붙어 있어 그냥 한 마을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도 편의상 상가수와 하가수로 나누어 부른 것뿐, 다른 마을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한다.

▲ 가수마을회관 도로 건너편에 있는 하가수마을 광장에 있는 정자나무
이러한 주민들의 인식은 가수마을이 경주 김씨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가수마을이 본래 경주 김씨가 정착하면서 이루어진 마을인데, 남원군 두동방 제언리에서 경주인 김지성(金之聲)이 입향조이다. 이후 조선 순조 때 장수군에서 밀양인 손석근, 고종 때는 서산인 유원섭이 가수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예전 마을에서는 마을 앞 당산나무에서 섣달 그믐날 저녁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전통이 사라졌다. 또 지금 원불교 가수교당 자리에는 수구막이 구실을 했던 마을 숲이 있어 서나무와 느티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광복 후에 없어졌다.

▲ 상가수마을에 있는 정자나무이다.
◆커다란 둥구나무 곳곳에
가수마을에는 세 곳에 둥구나무가 우뚝 서 있다.
먼저, 하가수마을이 시작되는 좁은 마을길을 사이에 두고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마치 마을 입구를 지키는 장승처럼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것 같다. 큰 나무 아래에는 농사일에 지친 주민들이 쉴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만든 평상이 있다.

다음은 하가수마을 한 가운데 정자를 끼고 있는 큰 나무 두 그루다. 도로 건너에 새 마을회관이 지어지기 전 낡은 마을회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헐어내고 아스팔트를 깔아 넓지 않은 광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무에 잎이 달리기 시작하면 광장 전체에 시원한 나무그늘이 드리울 것 같다.

마지막 하나는 상가수 마을에서 마을 안길 건너에 있다. 이 둥구나무 역시 정자를 하나 끼고 있는데, 앞에는 내가 졸졸 흘러 운치가 있다. 또 이 나무 바로 옆에는 내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지금은 사라진 상가수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때 사용하던 것이다. 지금도 상가수마을에서는 여름에 주민들이 모일 일이 있으면 이곳 나무 그늘을 애용한다.

▲ 예전 하가수마을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던 우물이다. 지금은 사진처럼 입구를 덮어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상가수마을의 우물은 하천을 정비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물이 귀했던 마을
예전 좌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대부분은 농업용수와 식수가 모두 부족했다. 가뭄이 들면 좌산리에 있는 모든 마을이 내동산에 모여 기우제를 지냈을 정도다. 지금이야 물맛 좋은 지하수와 산수도, 곳곳의 저수지 덕에 물 걱정 없이 살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물을 확보하는 게 큰일이었다.

가수마을 역시 물이 귀했던 마을이다. 특히 식수가 귀했다고 하는데, 상가수와 하가수에 각각 하나씩 있는 우물이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하지만, 이 우물은 늘 물이 부족해 마을 주부들은 밤이면 잠도 제쳐놓고 우물가에 나와 우물 바닥을 긁어가며 물을 길었다. 낮에는 농사일이 바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도 우물에 물이 바닥나면, 물이 필요한 주민들은 하가수 마을 아래쪽 내로 가서 물을 길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지경이다.
마을 우물 가운데 하가수 우물은 골목 한구석에 덮개가 덮힌 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상가수 우물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하천 공사를 하면서 사라졌다.

이런 마을의 목마름은 집집이 지하수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해갈됐다. 그렇게 부족한 줄로만 알았던 지하수는 콸콸 쏟아졌고, 5년 전 산수도가 들어와서도 물맛 때문에 지하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 상가수와 하가수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다. 앞에 있는 건물이 좌산보건진료소이고, 뒤로 보이는 곳이 원불교 가수교당이다. 이 곳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상가수마을이다.
◆교육열 높았던 마을
가수마을 가운데 하가수마을은 교육열이 뜨겁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인근지역에서 대학생이 가장 많았다고 하는데, 일부 노인들은 서울에 있는 국내 유수의 대학을 졸업한 경력을 갖고 있다.

주민들은 이것이 비교적 풍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농토가 넓어 괜찮은 수익을 낼 수 있었기에 자식 뒷바라지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 가운데는 지금에 와서 보면 마을의 인구 감소가 이 교육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분석도 내놓고 있다. 자녀들이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서 직장을 얻어 정착하면서 부모님까지 모셔 가면서 마을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것이다.

한 때 상가수와 하가수는 각각 70~80집까지 있던 큰 마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도시로 계속 나가면서 지금은 상가수 11가구 약 30명, 하가수 15가구 약 40명만 마을에 남았다. 물론 대부분이 노인이다.

▲ 가수마을에서 만난 이연임(61) 부녀회장과 이막래(86), 노순임(63), 강옥남(73), 오옥래(73), 송정순(71), 김점순(62), 신봉남(66)씨. 주민들은 늘 이렇게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밥을 지어먹으며 행복하게 지낸다. 특히 이날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은 마을의 젊은 일꾼들이 열심히 마을을 돌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마을노래’
지난해 8월 마을 주민들과 출향인들이 힘을 모아 세운 새 마을회관은 마을의 사랑방으로 애용되고 있다.
30평 넓이의 이 마을회관 옆에는 건립에 도움을 준 마을 주민과 출향인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비석이 회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농번기인 요즘 들어서는 이용하는 주민들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주민들은 늘 마을회관에 나와 함께 점심밥을 지어 먹으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마을을 찾아간 26일 오후. 마을회관에는 이연임(61) 부녀회장과 이막래(86), 노순임(63), 강옥남(73), 오옥래(73), 송정순(71), 김점순(62), 신봉남(66)씨 등이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처럼 지내요. 마을 노래가 따로 있을 정도라니까.”(강옥남)
그러면서 강옥남씨와 신봉남씨가 노래 가사를 맞춰본다.
“성수면 중에 있는 가수부락. 앞에는 내가 있고 고기가 놀고. 뒤에는 산이 있어 새가 울고.”

이 노래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마을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부르곤 했단다. 당시 마을에 살던 남자들이 함께 지었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마을의 주변 환경을 가사에 담아 ‘살기 좋은 마을’이란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옛날에 앞에 흐르는 내(마을 길을 따라 흐르는 내가 아닌, 원좌산 방향 내)가 얼마나 좋았다고요.”(송정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송정순씨가 나이 50대의 마을 일꾼들을 칭찬했다.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4~5집 사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노인들 배곯지 말라고 먹을 게 있으면 마을회관에 가져다주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 가수마을을 지나는 도로. 마을회관에 가려면 주민들은 이 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과속차량때문에 위험하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과속방지턱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 안전 생각해주길
심야전기 보일러 덕에 3월 말이 되도록 마을회관 방 바닥은 뜨끈뜨끈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집보다 마을회관에 나오는 게 더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 주민은 마을회관에 가기 위해 길을 건널 때 빨리 달리는 자동차 때문에 위험하다고 얘기했다.

 “다 노인들인데, 차가 워낙 빨리 달려서 많이 위험해요. 계속 과속방지턱을 만들어달라고 얘기하는데, ‘국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 쪽 마을은 해주고 말이에요.”

새 마을회관이 가수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과속차량의 위협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실제 마을회관을 나와 지켜보니, 다니는 차량이 많지 않아 대부분의 차량이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 농사 준비하는 산과 들
가수마을 동쪽으로는 ‘덜마레들’이라고 부르는 넓은 뜰이 있다. 논이 대부분인 이 뜰은, 예전 마을이 풍족하게 살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요즘 덜마레들은 봄을 맞아 새 농사를 위해 갈아놓아 보기 좋게 정리된 느낌이다. 논과 논 사이로 난 물길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콸콸 흘러 마을 앞 내로 흘러들고 있었다. 조만간 주민들은 논에 물을 채우느라 바쁠 것이다.

들은 물론, 산도 농사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산비탈에 일군 밭은 모두 갈아놓았다. 이제 가수마을은 본격적인 농사에 들어가기 위한 출발선에 있는 느낌이다.
덜마레들을 둘러보고 상가수마을로 돌아가자 김기옥(69)씨가 트랙터를 이용해 경운기 짐칸에 퇴비를 담고 있었다. 고추밭에 뿌리기 위해서다. 또, 마을 안쪽 곳곳에 있는 하우스에서는 고추모를 정성껏 돌보는 주민들도 볼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좌산리 고추를 유명하게 만든 바탕이 된 것 같다.

▲ 예전 가수마을 이발소가 있던 곳이다. 건물 오른쪽 출입문이 기대 있는 곳이 이발소 자리다. 줄을 서서 머리를 깎던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문 닫은 이발소
상가수와 하가수 사이 원불교 가수교당 옆에는 낡은 빈집이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언뜻 보기에도 상업용 건물로 사용했을 것 같은 이 건물은 예전에 이발소가 있던 곳이다. 건물 대부분은 이발소를 운영했던 주민이 거주하는 공간이고, 오른쪽 작은 공간이 이발소가 있던 공간이다.

이발소 공간 한쪽을 보니 사람들이 머리를 감았던 세면대가 보이고, 그 맞은편에는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을 긴 의자(나무 판자를 벽에 붙여 놓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집기는 볼 수 없었다.

사실 가수마을에는 이 이발소를 비롯해 곡식을 빻는 방앗간과 기름을 짜는 집, 떡 방앗간 등의 상업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좌산리의 중심에 있는 만큼 마을 주민 이외에도 다른 마을에서 찾아와 이용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한다. 마을회관에서 도로를 건너면 방앗간에서 사용하던 큰 방아 돌이 지금도 놓여있다.

이러한 시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이제 주민들은 버스를 타고 멀리 진안읍이나 임실군 관촌면까지 간다. 다행히 버스가 자주 있어 교통에 불편은 없지만, 그래도 주민들은 옛날 북적거렸던 마을의 모습을 되새기면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다.

▲ 마을 주민은 물론 출향인들이 몇십만 원에서 백만 원까지 모금해 지난해 건립한 가수마을 새 마을회관. 심야전기 보일러 덕에 주민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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