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번기로 많은 외국인주부들이 수업에 빠졌다. 하지만, 교실의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일찌감치 문화의 집을 찾은 팟사라 와디(33) 씨는 안내데스크에 기대어 쑥떡을 먹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팟사라 씨가 쑥떡을 먹는 모습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떡을 권하는 모습까지 매우 친숙한 우리네 아주머니 모습이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시아버지 자랑을 한창 풀어놓는 중이었다. 한글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배려해주는 시아버지는 이미 ‘며느리 사랑’으로 주변에 정평이 나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아이를 데리고 미루나 씨가 도착하고 보티 뮈 씨도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배가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는 보티 뮈 씨가 안쓰러운지 팟싸와라디와 미루나 씨가 달려들어 증상을 묻고 어깨를 토닥여 준다.
태국과 필리핀, 베트남 출신 여성들은 그렇게 진안 땅에서 만나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외국인주부들의 ‘수다’
진안군에서 평생학습 프로그램 중 하나로 시행하고 있는 ‘외국인주부 한글교실’은 매주 화요일, 수요일과 금요일 세 차례씩 진행된다.
수업준비가 한창인 교실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2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규모의 작은 교실이 왁자지껄하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까지 가세해 더하다. 잠시 후 우리군 유일의 우즈베키스탄 출신 최알라(28) 씨가 들어온다.

“저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출신이고요. 주천면 대불리에 살아요. 멀지요. 여기까지 오는데 차비만 3천 100원이에요.”
차비 얘기에 금방 교실의 화제가 교통비 얘기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얘기는 가지를 치며 쭉쭉 뻗어나간다. 누구의 고향 비행기표 값이 제일 비싼지를 서로 비교하더니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최알라 씨의 고향이 제일 비싸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농한기 어느 마을회관에서나 볼 수 있는 우리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수다를 떠는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님 장계윤(43) 씨가 들어오기 전 외국인주부끼리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국적이 다르다는 것이 더는 별 의미가 없었다. 오늘 교육참가자 중 맏언니 격인 네니따(38) 씨가 아들과 함께 들어오자 대화는 더욱 활기를 띤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죠.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대로 사 먹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이제 살만해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로움의 수준을 넘어 공포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아직도 완벽하지 않은 우리말 실력이지만 차츰차츰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참가자들도 느낀다. 아직 우리말이 익숙지 않은 보티 뮈 씨는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대화에 끼지는 못하지만 귀를 세우고 유심히 듣는다.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는 기자에게는 공책을 꺼내 보여주는 친절도 베푼다. 공책에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등 생활에 필요한 문장들이 삐뚤빼뚤 써 있다.
“우리 선생님 정말 좋아요. 친구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하고. 요리도 배워요. 그리고 여기 놀이방도 있어서 정말 좋아요.”

‘정기적금’에 관심 집중
수업을 시작한 장계윤 교사는 학생들에게 기자를 소개하곤 수업 전 계획했던 소풍 이야기를 꺼낸다.
“4월에 가려고 했던 소풍을 5월로 연기해야 할 것 같아요.” 
팟싸와라디 씨가 손을 들고 “5월에는 고향인 태국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다.”라고 사정을 이야기한다. “또 가느냐?”라며 부러움을 가득 담은 미루나 씨의 이야기에 다른 주부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급기야 장 교사에게도 팟싸와라디 씨와 함께 태국에 다녀오라는 생뚱맞은 제안이 이어진다. 교실 풍경 중 몇 가지 요소는 그 교실이 어떤 교실이든 비슷한가 보다.

결국, 소풍은 5월 말쯤에 가는 것으로 대충 협의를 끝마치고 수업에 들어간다. 피임 등 보건과 관련된 사항과 가공식품, 응급전화, 전자제품 사는 법 등 실생활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로 내용이 채워졌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이 때로는 울고 이리저리 교실을 돌아다녀도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 교사의 설명과 외국인 주부 학생들의 질문이 오가며 교실은 더욱 활기를 띤다.
대화 도중 툭툭 밉지 않은 남편 흉도 튀어나오고 부러움 가득한 탄성도 자아낸다.
최알라 씨는 엉뚱하게 ‘아들 낳는 법’을 묻고 미루나 씨는 능청맞게 비법(?)을 전수해 교실은 한바탕 웃음으로 가득하다.

잠깐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2교시 수업.
“선생님, 공제보험이 뭐예요? 공제하다. 공제보험.”
공제라는 말이 어려운 모양이다. 장교사의 설명을 듣던 미루나 씨가 가방에서 무엇인가 주섬주섬 들고 장 교사에게 다가간다.
“공제보험 내용은 모두 비어있는데 왜 싸인 만 했어요? 이거 잘 알아봐야 해요. 정기적금하고는 틀린 거예요. 집에 가서 꼭 남편하고 상의하세요.”

네니따 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몇 마디 거든다. 그 와중에 학생들은 장 교사의 입을 통해 나온 ‘정기적금’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운다. 외국인 주부들에게 우리의 금융상품과 이용방법 등은 아직 넘지 못한 산인 모양이다.
“정기적금이요? 그거 적어야겠다.”
학생 중 몇몇이 공책과 연필을 꺼내 옮겨 적는다. ‘정기 적금.’

장 교사는 우리말만 기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외국인 주부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불편함과 궁금함을 해결해 주는 중요한 구실도 하고 있었다. 장 교사가 외국인주부들에게 엄마이기도 하고, 언니이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장계윤 교사의 외국인 주부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녹아 있었다.


▲ 장계윤 교사
“모두 친한 언니 동생 사이"

인터뷰 - 외국인주부 한글교실 장계윤 교사

외국인주부 한글교실 장계윤 교사는 처음에 은빛한글반에서 4~5년 정도 한글을 가르쳤다. 그러다 진안군에서 지난 2004년 10주 프로그램으로 외국인주부 대상 한글교실을 운영했고 매시간마다 30명 가까이 출석하는 큰 호응이 있었다. 그 결과물을 보며 아예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외국인주부 한글교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도 그렇고 외국인주부들도 그렇고 많이 어색했죠. 그 어색함을 없애려 수강생들에게 요리도 가르쳐 주고 아이들 연령에 맞는 보육방법도 가르쳐 주었어요.”
장 교사는 요리관련 자격증도 가지고 있고 유아교육도 전공했다. 그것이 지금 외국인주부들과 마음을 열고 지낼 수 있게 된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국적이 서로 다른 외국인주부들이 모여 있으니 마음을 열고 지낼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매월 한 차례씩 생일을 맞은 수강생을 위해 생일파티도 하고 수강생들과 함께 결혼식이나 돌잔치에도 참석해 함께 축하해 주었다. 그처럼 함께한 노력의 결과물로 국적이 다른 외국인주부들 사이에는 언니·동생의 관계가 형성됐다.

지금은 화요일과 수요일 초·중등급반을 운영하고 금요일에는 합반을 운영한다. 갓 진안에 들어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주부를 위해 경험 많은 선배 외국인주부와 만날 수 있는 합반 운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자리에서 두렵고 어색하고 낯선 것들을 풀어놓게 하면서 선배들의 경험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면 적응하기가 훨씬 쉽다.
“처음에는 정말 속상하고 힘든 일이 많았죠. 하지만, 이제는 가르치는 입장보다는 친구예요. 흉허물없이 맘 편하게 서로 대할 수 있어서 좋아요.”

처음 가르칠 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덧 세상에 나와 엄마 손을 붙잡고 한글교실을 찾는 걸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뿐만 아니다. 폐쇄적인 태도를 보였던 남편들도 “고맙다”며 가을걷이 후 쌀이며 채소를 가져오는 걸 보면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보는 것 같아 기분 좋아진다.
“진안에 외국인주부는 대략 150명 정도일 거라고 봐요. 바람이 있다면 이들에 대한 행정차원의 지원과 관리가 단일화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평생교육팀과 여성팀 등 몇 개 부서로 나뉘면 아무래도 체계적이기가 힘들지 않겠어요?”
진안에 사는 동안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주부들의 따뜻하고 힘이 되는 ‘언니’가 되고 싶다는 게 장계윤 교사의 실현 되고 있는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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