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2 … 진안읍 가막리 죽도

글 싣는 순서

   용담댐의 역사를 찾아서, 인터뷰…사진작가 이철수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진안읍 가막리 죽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상거ㆍ하거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운교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운장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송림마을

 

내륙의 섬 죽도. 죽도는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에 있다. 죽도 역시 용담다목적댐(이하 용담댐)으로 인해 수몰된 곳 중 한 곳이다.
죽도는 대나무 죽(竹) 자와 섬도(島) 자를 사용한다. 대나무 죽 자를 보아서는 이곳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 섬도 자를 사용한 것은 이곳이 섬이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 면에서 섬은 아니지만 섬이 될 것을 예견한 옛 선인들의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지명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죽도는 장수군, 진안군, 무주군 등 세 곳에서 흐르는 냇물이 감돌아 감싸고 있어 섬이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또한, 죽도는 행정구역상 진안읍이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독립되어 있으며, 무인도 섬으로 보인다. 가마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죽도 양옆으로는 천반산과 부귀산이 병풍차림으로 그 장엄함을 뽐내며 둘러싸여 죽도를 품안에 품고 있어 이도 저도 갈 수 없는 곳이 된 것이다.
그곳에 윤상호(59)·이인순(56, 호적 이소지)씨 부부는 수몰의 아픔을 딛고 터를 잡아 살고 있다.


▲ 지금은 논이 되어 있어야 할 들이 여전히 자갈밭과 모래로 뒤덮여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물길을 돌려 논을 만들기위해 병풍바위 또는 벼슬바위를 폭파해 논을 만들겠다는 좋은 의도와는 다르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첩첩산중 속 가막리
지금의 가막리는 1895년(고종 23)에 진안군 여면(輿面)의 신기리였다. 그 후로부터 19년이 지난 1914년 3월 1일에 진안군 진안면(읍) 가막리가 됐다.
가막리는 더할 가(加)자와 장막 막(幕)자를 사용한다. 이 또한 선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여러 산이 겹치고 겹친 산속에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인 조건을 보고 가막(加幕)이란 지명을 붙인 것이다.

이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지역에 1600년쯤 경주 정씨가 들어와 터를 잡았고, 그 후로 밀양 박씨, 경주 이씨, 나주 전씨, 천안 전씨, 파평 윤씨, 창녕 성씨, 경주 최씨, 엄씨, 우씨, 오씨 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하 가막 마을 그리고 죽도마을(대섬마을)이 화합하며 생활하고 있다.

가막리에는 사산막(四山幕)이라 해 천반산에 3집, 죽도에 3집, 도화동에 7집, 부귀산에 3집이 1960년대까지 살았고 용담댐으로 수몰되기 전까지 가막리 13집과 죽도 3집이 살았다.
가막리는 동쪽에 있는 장수군 수분리에서 발원한 천을 사이에 두고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 신기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감투봉 줄기가 뻗어 있으며 사근질이라 부르는 고개 너머 상전면 주평리 지사마을에 이르게 된다.
남쪽으로는 봉우재 너머에 진안읍 오천리 외오천 마을과 이어지며, 북쪽에는 천반산 너머 성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3형제 바위가 나란히 놓여있다. 좌측부터 막내, 둘째, 첫째 바위이다.
가막리 속 내류의 섬 죽도
죽도는 오지 중 오지이다.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이러한 곳을 찾아가려니 죽도를 향하는 발길은 마냥 무겁기만 했다. 더군다나 지프(jeep)와 4륜구동 차량이 아니면 수몰된 지역을 찾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접근금지’ 구역으로 지정해 놓은 것 같아 보였다. 외로운 내류의 섬 죽도에 기자가 만나야 할 윤상호씨가 살고 있다. 그 주인공이 그 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특별히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죽도를 찾아가는 길은 험했다.

지난 3일 목요일. 진안읍에서 죽도로 발길을 옮겼다. 일반국도 30호선을 따라 무주와 상전방향으로 차량을 몰고 달리다보면 언건교차로 이정표가 나온다. 그 곳에서 동향면과 상전면 방향으로 지나다보면 1km도 달리기 전에 우측으로 상전면사무소를 발견할 수 있다.
상전면사무소를 지나 원주평교를 건너 중기마을을 지나고, 중기교를 지나서 내송과 외송마을을 접할 수 있다.

이곳에서도 동향면 장전마을까지 찾아가야 한다. 장전마을에 도착하면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장전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천반산 등산로 이정표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상전에서 동향면 장전마을을 도착하기 전 지점에 ‘천반산 등산로 동향방향 2km란 푯말이 전부였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축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면 하천을 막은 보가 보인다. 이곳부터는 지프와 4륜구동용 차량을 이용해야 죽도로 찾아 갈 수 있다.

기자가 타고 간 승용차로는 어림도 없는 길이었다. 다행히 윤상호씨가 보유하고 있는 4륜구동 화물차를 이용해 물길을 건너고, 산을 넘어 윤상호씨 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윤씨의 집에 도착하기까지는 자갈과 모래로 만들어진 비포장도로를 지나야 했다. 한참을 지나 차량을 몰아가던 윤씨가 차량을 세웠다. 그 곳은 벼슬바위 또는 병풍바위가 서 있었다. 하지만 1970년쯤 물길을 돌려 논을 만들기 위해 병풍바위 중간을 인위적으로 폭파해 자연이 상처받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논을 만들기 위해 병풍바위를 폭파했지만 논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논을 만들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실행에 옮기지 못할 일을 사람들이 저지른 것이다. 논을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힘써 보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래서 죽도 폭포가 생겼다. 죽도 폭포는 자연폭포가 아닌 인공폭포다. 또다시 사람의 손으로 자연경관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작은 태양광 발전소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업에 1억 2천만원의 예산이 소요되었지만 지금은 흉물로 방치되고 있다.

윤상호씨는 이곳을 지나 칠 때마다 주민들의 낸 세금을 들여 건설한 태양광 발전소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
“4만여평의 논을 만들기 위해 병풍바위를 폭파한 것 까지는 경작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좀 더 멀리 내다보았어야 했지 않았나 싶어요. 경작지도 만들지 못하고 자연환경만 훼손한 일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병풍바위를 폭파해 죽도폭포가 만들어 졌지만 인공적으로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해 사용도 못하고 있어 안타까워요. 좋은 경치만 훼손하고 방치해 놓았죠.”

▲ 죽도에서 유일한 집. 이곳에서 윤상호씨와 이인순씨가 살고 있다.
윤상호씨 1호 보물 ‘화물차’
이정표도 없는 험한 길을 다녀야하는 불편함에 읍내에 볼일을 보기 위해서는 큰맘 먹고 외출을 해야 한다.
윤상호씨는 특별한 볼일이 없으면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험하고 위험한 길을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천의 보를 막은 물길에는 자갈과 큼지막한 바위가 위험한 곡예운전을 부축이고 있고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험준한 산길을 차량으로 오르고 내리는 데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죽도를 오가는 주행 길은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더욱 위험하다. 물이 불어 물길을 막고 경사가 심한 산길을 오가는데 위험부담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상호씨는 지금까지 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하다보니 윤씨는 4륜구동 화물차가 제1호 보물이 되었다.
차량이 고장이로도 나면 생계에 큰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량점검은 윤씨의 삶에 최우선적이다.“차량을 점검하는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고 있어요. 차량이 없으면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거든요. 읍내에 갔다 와서 읍내를 나갈 때는 항상 이상이 없는지를 먼저 살피곤 하죠. 운행중에 멈추면 곤란하니까요.”

파평 윤씨 자리 잡은 곳
윤상호씨가 오가는 길은 매우 친근한 곳이다. 지금은 수몰되면서 하천이 되었지만 300여년 전 파평 윤씨가 터를 잡고, 괭이와 삽으로 개간해 경장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불모지였던 4만여 평의 넓은 뜰은 파평 윤씨에 의해 기름진 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당시 기름진 땅에서 생산한 쌀이 최고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파평 윤씨는 넓은 뜰을 개간해 생산된 곡식으로 부농이 되었다.
윤상호씨는 자신의 조상들이 죽도에 터를 잡고 일궈놓은 농경지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다.
“진안 지역에서는 부자간 난 곳은 손으로 꼽는다면 바로 죽도가 최우선이었죠. 그만큼 들이 넓고 기름진 곳으로 알려졌죠. 조상님들께 들은 이야기로는 넓은 들에서 생산된 쌀을 지게로 날라 겨울내 타작을 했다고 하더군요.”

진안에서 최고의 부자가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파평 윤씨는 넓은 들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부농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은 파평 윤씨에게 불운을 안겨 주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를 맞으며 파평 윤씨의 땅은 일본인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는 엎친 곳에 덮친 곳으로 대 홍수로 모든 경작지가 수몰되었다. 그로 인해 농작물은 모두 물에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이제는 용담댐 건설로 사용할 수 없는 터가 되었다.

정여립 사건
죽도에 위치한 천반산에는 조선 선조 때 반역의 협의로 쫓겨 온 정여립이 송파굴에 숨어 관군과 싸웠다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여립은 이곳 송파굴에서 관군에게 잡히기 전에 자결을 한 곳이기도 하다.
송판서굴은 천반산 암벽위에 있는 30평 규모의 굴이다. 이곳에서 정여립은 사람들을 모은 것이다. 정여립의 흔적은 천반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성터이다.

성터에는 한림대터와 정여립이 말을 타고 뛰어다녔다고 하는 뜀바위가 있고, 군사의 훈련한 흔적이 곳곳에 베어있다.
성터를 언제 누가 쌓았는지는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둘레 2천미터 였다고 전해지며 서북쪽에 성문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1천미터 정도의 돌 흔적만이 남아있다.

▲ 용이 바위를 감싸 하늘로 올라간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 승천바위로 불린다.
용의 전설
죽도폭포에서 800여 미터쯤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강 가운데 용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 용 바위에는 이 곳 하천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 바위에는 용이 하늘로 오르기 위해 힘을 써 여러 곳이 움푹 들어간 자국이 또렷하게 남은 바위를 보고 전설로 전해져 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용 바위는 그 자리에 없었다. 용 바위는 98년 겨울에 서울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던 사람이 관상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굴삭기를 동원해 훔쳐갔다. 한 사람의 욕심이 자연경관을 훼손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용 바위의 독특한 생김새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수난을 당했다. 용담댐 건설로 용 바위가 물에 잠기게 된다는 것을 되자 상전면과 가막리 주민들 사이에 소유권 다툼이 벌어졌다. 그로인해 용 바위는 상전면 일부 주민들이 상전 망향의 동산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용 바위는 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가막마을 사람들의 주장이고 윤상호씨 또한 이치에 맞다고 한다. 용 바위는 물속에 잠겼다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용 바위는 죽도의 자연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3형제 바위와 승천바위와 함께요. 그런데 용 바위만 상전 망향의 동산으로 옮겨놓아 이가 빠진 겪이 되었어요.”

죽도에는 용 바위와 함께 3형제 바위와 승천 바위가 있다. 3형제 바위는 용바위에서 300여미터 떨어진 곳에 큰 바위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어 3형제 바위로 불리어 지고 있다.
승천바위는 용이 바위를 감싸며 하늘로 올라갔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를 둘러보면 아래에서부터 소라의 껍데기처럼 빙빙 비틀리어 고랑이 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누군가 내 물건을 빼앗으려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것이다. 그렇지만 빼앗으려는 사람의 힘이 강하면 어떨까? 아마도 반항은 해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 일 것이다. 용담댐 건설을 위해 서민들은 많은 투쟁을 했다. 용담댐을 막아보려고…. 하지만 강자에게 대항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진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강자에게 대항할 수 없는 약자들이었다. 진안읍 가막리 죽도에 살고 있는 윤상호씨.

그 역시 강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용담댐 건설로 인해 보상은 받았지만 그를 바라볼 때 손해를 보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뿐이었다.
윤상호씨 댁을 찾아가 보았을 때 처음으로 느낀 점이 오고가는 도로다. 임도를 조성해 만들어 놓았지만 경사가 급경사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곳을 그동안 어떻게 다녔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차례를 걸쳐 임도를 조성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급경사였다.

또한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강원도 산골 오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죽도였다.
사람이 살기란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윤상호씨는 아내 이인순씨와 조상의 뜻을 기리며 살고 있었다.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이 집을 지었어요. 놀면 뭐해요. 그래서 논농사와 인삼농사를 하려고 용담댐에 찾아갔죠.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물에 피해가 간다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터가 물에 잠겨 이제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집 아래 터를 가리키며 윤씨는 자신이 살았던 곳을 가리켜 본다. 오래전 태풍으로 모래가 쌓여있는 곳을 가리키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모습이다.
"저곳 보이죠. 저곳이 제가 살던 곳이에요.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이죠. 그 옆에 학교 분소가 있었어요. 1학년 1시간 2학년 1시간. 학년별 공부할 때 나머지 학년은 놀 수밖에 없었죠.”

분소는 분교 아래의 또 다른 학교명이다. 학생 수가 적은 죽도마을에는 분교가 자리할 수 없어 교사 한 명이 전부를 가리키는 분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분소에서 죽도 마을 학생들이 배움을 가졌던 곳이죠. 멀리까지 학교를 다닐 수 없어 분소를 만들었죠.”
하지만 분소마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죽도는 윤상호씨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파평 윤씨 조상들이 300여 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제가 파평 윤씨 36대 종손입니다. 그래서 조상님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머물러 있죠. 그렇지 않았으면…. 젊은 사람들은 진안 윤씨라고 부르고, 나이 먹은 분들은 죽도 윤씨로 부르죠. 그런데 제 대에서 끊길 것 같아요.”

조상의 묘를 지켜야 갰다는 생각에 조상이 살아온 터전을 외면하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살아온 조상의 얼을 기리며 끝까지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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