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천대 피해 일군 상거마을, 이젠 용담호에 빼앗겨
거인이 놓았다는 수박다리 전설 하거마을, 부녀회 활동 활발

글 싣는 순서

   용담댐의 역사를 찾아서, 인터뷰…사진작가 이철수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진안읍 가막리 죽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상거ㆍ하거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운교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원장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송림마을

 

▲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상거마을에서 이주해 현재 용담면 송풍리 문화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 사진 왼쪽부터 정봉순, 송종순, 고계선, 김순덕, 이순단(송풍리 새마을에서 이주)씨.
용담면(龍潭面)의 유래

용담 면사무소는 진안군 용담면 옥거리 228-1번지에 있었다. 물론 용담다목적댐으로 수몰되기 전 이야기이다. 본지 이번 호에서는 용담 상거·하거 마을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을을 소개하기 전 먼저 용담에 대해 알아보았으면 한다. 용담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용담은 삼국시대에 물거현(勿居縣)이라 불리었다. 그 후 757년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맑을 청(淸), 개천 거(渠) 자를 써 청거현(淸渠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지금의 금산인 진례현(進禮縣)에 속현(屬縣·지방관이 파견된 군이나 현에 속한 낮은 급의 지방행정 단위)이었다.

지금의 용담(龍潭)이란 명칭은 고려시대 1313년, 충선왕 5년에 비로소 붙여진 것이다. 이때부터 고을의 이름이 붙여지고 현령(縣令·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둔, 큰 현(縣)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육품이며 신라 때에는 대소의 구별이 없이 각 현에 두었다가, 고려·조선 시대에는 큰 현에만 두었으며, 작은 현에는 감무 또는 현감을 두었다.)을 두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용담의 백성은 소박하고 꾸밈이 적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기(州記) 또한 ‘땅은 궁벽하고 하늘이 깊으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노후하다. 구름다리가 산에 걸리고 돌길은 시내에 연해 있다. 백성은 드문드문하며, 푸른 절벽이 만 겹으로 겹쳐있다.’라고 되어있다.

또한 용강산(龍岡山)과 마산담(馬山潭)을 소개하고 ‘현(縣)의 동남쪽 두 물이 서로 모이는 사이에 용담이 있어 현명(縣名)으로 취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용강산과 황산 말뫼산 아래에 있는 마산담에서 용 자와 담 자를 따 용담이 된 것이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는 남원 도호부의 용담현이 되어 현감을 두었으며, 1646년 인조 24년 현감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1656년 효종 7년에 현령을 두고 별호를 옥천(玉川)이라 하였다. 용담은 애초에 군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등 5개 면이었는데 1895년 고종 32년에 용담군이 되어 9개면 143리를 관할하였다.

용담의 소재지인 군내면은(지금의 동향면) 일동면과 이동면 그리고 주천면이 된 일서면과 이서면, 정천면인 일남면과 이남면, 안천면인 일북면, 이북면 등 있었다.

5개 면을 관할한 용담군은 1914년에 진안군에 통합되면서 용담면이 되었다. 용담면은 구) 용담군의 군내면인 월계리, 호계리, 수천리, 와룡리와 이북면 송풍리가 있었다.

▲ 출처: 진안문화원 '용담지역문화 2'에서

상거마을 세대배치도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1. 박흠복

2. 김옥분

3. 권기조

4. 이종원

5. 유성근

6. 정필재

7. 문태원

8. 창만호

9. 김광성

10. 한천주

11. 김치주

12. 김치준

13. 고병호

14. 김영의

15. 한국자

16. 김주창

17. 김철종

18. 김의선

19. 손해운

20. 육일철

21. 전정금

22. 손기운

23. 박기문

24. 육완상

25. 이정애

26. 김현기

27. 신점영

28. 신영석

29. 조병희

30. 김현권

31. 박필석

32. 김해철

33. 김연해

34. 양점순

35. 김정자

36. 정선금

37. 문호진

38. 문장철

39. 손상운

40. 박상기

41. 한영복

42. 문동철

43. 박연옥

44. 최화봉

45. 장태호

옥과 같이 맑은 상거마을
상거마을은 1895년 고종 32년에 용담군 군내면 상거리(上渠里)와 상동산리(上東山里)의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두 상거리와 상동산리를 합해 진안군 용담면 옥거리 상거마을이 되어 지만 용담다목적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상거마을은 1895년 고종 32년에 용담군 군내면 상거리(上渠里)와 상동산리(上東山里)의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두 상거리와 상동산리를 합해 진안군 용담면 옥거리 상거마을이 되어 지만 용담다목적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상거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옥과 같이 맑다 하여 옥거(玉渠)라 하였고 옥거리의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해서 상거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상거마을에는 1670년경 10여 가구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고 김씨, 박씨, 문씨, 한씨, 손씨, 육씨, 신씨, 정씨, 이씨, 권씨, 유씨, 창씨, 고씨, 전씨, 조씨, 양씨, 박씨, 문씨, 최씨, 장씨 등이 살았다.

이 마을은 1670년쯤 인근 양반들의 천대를 피해 모인 10여 가구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 많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한지골(恨地谷)이라 불렀다. 그 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생이 태고정(太古亭)을 심방했을 때 주민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 한족골(恨足谷)이라 탄식했다는 설화가 있다.

상거마을은 한젓골의 시내를 중심으로 또랑가 마을과 안동네 등 두 개의 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거마을에서 바라본 동쪽은 운교마을을 지나 용강산이 있다. 용강산은 용담의 진산으로 산등성이가 아홉 번 꿈틀거리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여겨졌다.

서쪽에는 태고정이 있고, 옛날 주자천이 달려오다 태고정 동산 바위에 부딪혀 굽이치는 이곳에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태고정 고개를 넘어 와룡리의 신정마을과 원와룡마을을 지나 주천면과 정천면으로 이어졌다.

남쪽은 하거마을과 원장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자천이 흘러 내려가는 쪽으로 오리정들을 지나 용담교에 이르렀다고 한다.

북쪽에는 옥거리 저수지가 있는 한젓골이 있고, 피악골을 지나면 송풍리 회룡마을로 이어지는 옛날 길이 있었다.

태고정은 조선시대 현령 조원범이 작은 정자를 짓고 이요정(二樂亭), 대선루(待仙樓) 또는 만송정(晩松亭)이라 불러왔는데 1666년 현령 홍석이 이요정 위쪽에 정자를 만들고 태고정(太古亭)이라 하여 맑은 바람(太古亭風)은 용담팔경 중 하나가 되었다.

태고정은 조선시대의 정자로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으며,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2호로 지정됐다. 송준길(1606~1672)이 쓴 ‘태고정’ 현판과 송시열(1607~1689)이 쓴 ‘용담태고정기’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나 용담댐 건설로 인해 해체되어 용담면 수천리 망향의 동산에 새로 세워져 옮겨졌다.

태고정 경내에 있는 비석 돌들은 일제가 역사를 묻을 목적으로 원장 앞 냇물 징검다리로 놓아 사람들로 짓밟고 다니게 하였다. 주민 스스로 세운 공적비를 주민 스스로 딛고 다닌 험난한 역사였다.

공적비는 1723년 현령 신태동 휼민 선정비, 1846년 현령 홍원섭 영세 불망비, 1886년 현령 정한규 청덕애민선정비, 1897년 현령 이승소 청백 애민선정비, 1897년 초대 군수 임정수 영세 불망비, 1924년 전참봉·임원식 출의불망비, 1937년에 세운 전 조합장 문종엽 영속기념비, 1983년 관찰사 조강하거사비 등이다.
태고정 아래쪽은 물이 깊지도 얕지도 않아 여럼철이면 물놀이를 하는 곳이다. 남녀유별을 실천한 사람들은 구역을 정해놓고 위쪽에서 남자가 아래쪽에서 부녀자의 목욕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욕바위라고 하였다.

태고정을 뒤로하고 주자천을 거슬러 와룡리로 가면 오른쪽에 도실골이 있다. 도실골에는 덜럭바위가 있고 성재산이 보였다고 한다. 도실골은 옛날의 소로길이 있는데 봉오재를 넘으면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로 이어진다.

왼쪽에는 사름밭보, 사름밭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가는 골이 있어 멀리 성재산이 보였고, 성재산은 임진왜란때 곽재우 장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 있다.

모덕골에서도 성재산이 보인다. 모덕골 다음의 절골에 들면 천태산 옥천암과 사곡폭포가 있다.

옥천암 아래에는 사곡폭포 또는 옥폭포가 있다 하여 옥폭동이라 했다. 상거마을에는 1923년에 설립한 교회는 용담면 옥거리 467-4 번지에 용담교회가 있었다.

▲ 출처: 진안문화원 '용담지역문화 2'에서

하거마을 세대배치도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지도No-세대주

1. 서범준

2. 권상용

3. 김치병

4. 이순금

5. 고영만

6. 권인상

7. 육원철

8. 김일순

9. 고하상

10. 변례분

11. 문오봉

12. 원남례

13. 고근상

14. 전명규

15. 최이분

16. 배병선

17. 이봉열

18. 고병호

19. 김순애

20. 이용옥

21. 방수란

22. 신종수

23. 도분단

24. 김옥주

25. 황순덕

26. 김진언

27. 김만식

28. 조용식

29. 이남재

30. 박복인

31. 최순녀

32. 왕순열

33. 김완철

34. 강영례

35. 방성수

36. 최홍선

37. 방희선

38. 김석진

39. 유태준

40. 박기창

41. 고덕주

42. 양명기

43. 박중근

44. 정재득

45. 정인수

46. 이도진

47. 정재권

48. 박상호

49. 정득순

50. 임쌍재

51. 변한철

52. 남정희

양지바른 하거마을
하거마을은 1895년 용담군 군내면 하거리(下渠里)였으며, 1914년 3월 1일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하거마을이 되었다.

하거마을은 1895년 용담군 군내면 하거리(下渠里)였으며, 1914년 3월 1일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하거마을이 되었다.

용담지역이 예전에는 옥천(玉川)이라고 불린 것처럼 물이 맑고 산이 빼어났다고 한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은 수성천이라 한 것처럼 수천리가 되었고,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 중 아래쪽에 있는 물 막은 마을의 뜻으로 하거마을이라 이름 지어진 것이다.

하거마을은 마을의 북쪽 한젓골에서 시작한 시냇물을 가운데에 두고 또랑가말과 안동네말로 나누어진다. 옛날에는 수박마을이라고 부른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1800년경 제주고씨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수몰되기 전까지 김씨, 이씨, 고씨, 박씨, 정씨, 방씨, 최씨, 권씨, 변씨, 문씨, 서씨, 육씨, 원씨, 전씨, 배씨, 신씨, 황씨, 조씨, 왕씨, 강씨, 유씨, 양씨, 염씨, 남씨, 도씨 등이 살았다.

하거마을애소 본 동쪽에는 용강산이 있었다. 용담에 뜨는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양지바른 마을이다. 운교마을, 용담초등학교를 지나 용강산 줄기인 금봉재를 넘어 송풍리로 이어지는 구 길이었다.

서쪽으로는 금강 상류인 수성천을 건너면 안들이 있고, 매봉산 기슭에 자리한 송림마을이 있었다.

남쪽에는 원장마을을 지나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옛날 죽천교라 한 용담교가 있었으며 진안과 금산으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되기도 했다.

북쪽은 상거마을을 지나 한젓골이 있었다. 다시 피아골에서 송풍리 회룡마을로 이어지는 구 길이다.

하거마을 경로당 앞 광장은 마을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사방팔방으로 마을 안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마을회관에서 핑구재 기슭을 돌아 송림으로 가는 곳에는 2m의 다리가 있었다. 한젓골 물이 수상천으로 들어가는 지점이기도 했다. 1970년경까지 이곳에는 긴 쪽이 8m, 짧은 쪽이 3m, 높이 0.5m 정도의 커다란 바윗돌을 걸쳐 이용하면서 수박다리라 하였다고 한다.

수박다리는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랜 옛날 ‘김 수박이라는 거인(巨人)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힘은 장사였지만 우둔한 관계로 주민들로부터 김 멍청이라 놀림을 받았다. 거인은 홧김에 약 4㎡ 되는 큰 돌을 마을 핑구재에서 가져와 하거천(下渠川)에 돌다리를 놓았다.’라고 한다.

김 수박이 놓은 다리라 해 수박다리라고 불렀고 또한 마을 명칭도 수박마을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이 수몰되기 전 큰물로 인해 바위가 어긋나 시멘트 다리를 놓으면서 바위는 길 밑으로 들어갔다.

수성천 건너편에는 매봉산의 긴 줄기 즉 쇳독 뿌리가 이루어낸 소요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곳 소요대는 용담 팔경의 하나인데 바위, 나무, 물이 어우러진 경치 좋은 곳이다. 농사철이 되면 보또랑 물이 흘러넘쳐 폭포가 된다고 한다.

핑구재는 태고정이 있는 기슭의 동산이다. 하거마을에서 송림으로 넘어가던 작은 재가 있기도 했다. 일본 침략기에는 한적한 이곳에 독립투사들을 끌고와 매질하며 고문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하거마을에는 1987년 9월에 천주교회 용담 공소가 들어왔다. 천주교회는 권인상씨가 설립했으며 당시 50여 명의 신도가 있었다고 한다.

또 하거마을은 첫 셋방에서 시작한 부녀 경로회가 있었다고 한다. 부녀 경로회는 1982년 건물을 마련해 현판을 걸고, 입회비 500원과 희사금을 모았다. 회비와 희사금이 많이 모여 매일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부녀 경로회는 김순애(1917년생) 회장, 서옥성(1920년생) 부회장, 문금순(1912년생)씨 및 회원들이다.

하거마을에는 1968년에 마을회관을 지었다. 그 위치는 용담면 수천리 175번지였다. 수천경로당은 전국 모범 경로당이 되었다. 자치활동과 지역봉사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수천경로당은 보건사회부장관으로부터 1986년 12월 31일 모범 경로당 인정서를 받았다.

▲ 박상호씨
인터뷰  … 박상호 문화마을 이장   

 

우여곡절 끝에 건설된 용담다목적댐. 댐 건설은 많은 사람을 울게 하였고, 웃게도 하였다. 그러나 댐은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그 대가는 주민들에게 커다란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 대표적인 주민이 박상호씨이다. 박씨는 하거마을에 터를 잡고 생활했다.
하지만, 댐으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는 생각에 수몰지역 주민들과 함께 댐 건설 반대투쟁에 참여했다.

시위대는 군청 앞마당에서 궐기대회를 했고, 전경이 쏜 최루탄은 많은 사람 가운데 박상호씨 왼쪽 눈에 맞아 실명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박씨는 정부와 군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현재까지 생활을 하고 있다.

“용담댐 건설 반대를 위해 주민들과 함께 댐 건설 반대 현장에 있었죠. 그런데 어디에서 날라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최루탄이 날라와 눈에 맞았어요. 그래서 전주 예수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눈은 실명됐죠. 하지만, 아무런 보상도 없더군요. 그런 면에서 댐이 원망스럽죠. 눈이 없어 잘 보지도 못하고 짜증나고요. 이젠 도리가 없어요. 이제는 누가 보상해 주는 것도 아니고….”

박씨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뿐만 아니다. 박씨는 하거마을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용담면 송풍리 문화마을로 이주하면서 1/10도 되지 않는 터에 현재는 1천 포기 고추를 심으며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 농사도 짓지 못하지만 하거마을에서 중간 농사는 지었죠. 이제는 작은 텃밭에 그런 데로 생계만 유지하고 있어요. 옛날 생각은 많이 나죠. 마을풍경이며 친구들이며 그 시절이 그리워요. 이제는 생각만 할 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용담댐은 수몰민에게 모든 것을 뺏어가고, 그리움만 남겨 놓았다.

바로잡습니다. 수몰지역 지명 중 '용담면 운장마을'을 '용담면 원장마을'로 바로잡습니다. 수몰지역에 대한 지명은 용담다목적댐 보상백서의 내용을 참고했으며, 보도 후 수몰지역 주민들로부터 "운장마을이 아닌, 원장마을이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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