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 김모일
김 모 일 씨
성수면 좌산리 가수마을 출신
승리문화사 대표
서울시 인쇄정보산업협동 조합회원
재경성수면향우회 부회장
재경진안군민회 섭외담당이사

래동산 정기받아 닦아진 터전/말그고 발그은 우리의 동네/뒤에는 산이있고 새가 울고요/앞에는 내가있고 고기가 노네/오백명 부락민 일치단결로/나가세 나아가 행복스럽게/

가수(佳水) 마을에는 1946년경부터 드물게, 마을의 노래가 있어 주민들이 함께 즐겨 부르며 명절이나 면의 대항행사 때에는 함께 응원하며 뽐내 오는 전통이 있었다. 마을 뒷산의 범바위산은 개가 호랑이를 무서워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 마을에 큰 인물은 없으나 개 팔자처럼 의, 식, 주는 아쉬움이 없다는 믿거나 말거나식 이야기가 구전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일찍 1977년부터 원불교 출장법회 가수원불교가 설립되어 주민 교화에 힘써 온 결과로 꽤 많은 주민들, 특히 나이가 많은 주민들의 대부분이 그 영향권에 있는 것 같았다.

김모일씨의 일거수 일투족에 인정미가 넘치고 다른 사람들을 보살핌이 남다르게 능숙하게 세밀하고 모든 사회생활에 익숙하고 능숙하게 집혀 보이는 것은 그의 타고 난 선천적 침착성과 숨겨 있었던 후천적 협조성의 내면 이였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그 다지 눈에 띄지 않는, 없는 듯 있어야 하는 곳에는 항상 있었던 그의 행적은 그가 일가의 장남으로 오랜 어린 시절을 외가의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 왔었던 후천적 직계사랑 결핍의 영향이 아니였나 그렇게 필자에겐 느껴졌다. 그는 선천적으로 성실하고 솔직한 직설적 언어로서 어른스러운 협조성을 지녔지만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 받는 것도 싫어하였다.

김모일. 그는 세상을 혼자서 살아왔다고 했다. 평생을 통하여 그는 자신이 혼자였음을 강조한다. 그 속에서 그는 꾸준하게 자신의 인생을 다듬어 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얻어지는 외로움을 즐길 줄 안다. 그가 휴일이면 혼자서 태공(太公)이 되어 물고기 몇 마리와 그 조그마한 방죽에 세상을 논(論)하는 것도 그의 오랜 버릇이라면 버릇이다.

이제 막 50을 넘긴 그의 연륜이 작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게ㅜ큰 것은 그의 그런 연유가 아닌가 싶었다.
김모일씨는 1957년 아버지 김후경(81)씨와 어머니 강옥란(73)씨의 2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좌산초등학교5학년 때, 당시의 국가 교육정책에 영향 받은, 불평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런 연유로 인하여 전주로 전학, 초등학교를 마치고 전주동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주위의 그것과 자신이 내면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간직하고 있었던, 알 수 없었던 열등의식의 그 영향으로 중퇴하고 만다. 1971년 인쇄소를 운영하던 인척의 연고를 찾아서 상경, 서울 경 인쇄소에서 5년, 청암사에서의 10년, 그리고 해동산업전수학원에서 대입검정에 합격하여 고등학교졸업자격을 얻어 냄으로서 그제서야 자신이 알 수 없었던 중학교 중퇴의 정서적 의미를 깨달았단다. 그리고 지인(知人)과 함께 인쇄소를 동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참으로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지는 신(神)의 의미가 무엇인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하였다던가. 동업하였던 그 업장(業場)이 화재로 소실(燒失)되고 만다. 절망과 허탈과 굶주림에서의 그의 방황은 끝없는 굴레가 되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헤메다가 쓰러지고, 목 놓아 울다가 비틀거리고, 굶어 지친 뱃속은 아사(餓死) 직전의 상황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

초연(硝煙)이 스쳐간 전장(戰場)에서 가지 상등병의 휘청거리는 걸음을 그가 꿈속에서처럼 본다. 타다 남은 전장의 흔적, 늘비하게 쓰러져 있는 시체들, 그 속에서 살겠다고 휘청대며 걸어가는 인간의 의미를 그가 본다. 죽을 수가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 가지 상등병의 그 처절한 울부짖음 위에 김모일 그는 겹쳐 쓰러진다. 그리고 그도 그렇게 울부짖는다. 전장과 사회의, 전쟁과 생활의 접목(椄木)을 그는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다시 대성당 인쇄소에서 2년을 보낸다. 방위근무와 아르바이트 생활의 2년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에의 시작 이였다. 1991년 봄. 김모일씨는 지나 간 모든 역경(逆境)의 반석(盤石), 그 위에 『승리문화사』를 창업한다.
인간의 그 길은 탄생에서부터 시작되며, 인생의 그 시작은 결혼에서 부터이다.

김모일씨는 그의 아내와의 만남을 행운이라고 표현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이 맏 며느리를 복덩이라고 지칭하는데 어떤 이의(異意)도 없다고 그랬다. 그가 30세에 조은숙(임실.관촌.47)씨와 중매로 결혼. 1남1녀를 교육하고 길러내기까지. 삭을세로 시작하여 전세로, 그리고 10년만에 그가 이 서울에 자신의 집을 갖기까지 끼쳐 준 아내의 내조를 고마워한다. 다시 태어나도 그는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설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모일씨.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의 행동하는 책임감, 프라이드 강한 완벽주의자, 조용한 인상 속에 숨어있는 이상과 정열, 어색스런 유머와 미소가 차라리 애교인 이 남자, 어릴 적 선생님이 되어서 사도(師道)의 길을 가고 싶었던 이 사람. 이제 우리는 이 사람을 더 이상 외로운 사람으로 버려두지 말자.
김 모 일 H,P ; 011ㅡ262ㅡ1420

 /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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