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잘 된다는 서대들, 동학혁명 거점지역 용강산엔 봉화대 그대로

    글 싣는 순서

   용담댐의 역사를 찾아서, 인터뷰…사진작가 이철수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진안읍 가막리 죽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상거ㆍ하거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운교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원장마을

   수몰민이 부르는 고향 노래…용담면 송림마을

 

 

 용담의 중요 요충지로 알려진 운교마을. 운교마을은 용담의 소재지였다. 소재지인 만큼 운교마을에는 향교와 초·중학교 그리고 면사무소와 농협, 우체국, 소방서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이러한 운교마을은 1895년 고종 32년에 향교가 있던 마을이라 해 용담군(龍潭郡) 군내면 교촌이었다. 이후 1914년 3월 1일에 진안군(鎭安郡) 용담면(龍潭面) 옥거리 운교마을이 되었다.
변화와 변화를 거듭해온 운교마을을 이제는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속 기억 저편으로 묻어야 할 고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운교마을이 용담에 존재할 때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주민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 수몰되기 전 용담면 소재지의 모습
먼저 운교란 마을 이름은 바위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운교마을 뒤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있었다. 그 곳은 바위를 놓아 건너 다녔다.
바위 모양이 둥그런 구름모양 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운교라고 붙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둥그런 구름다리가 놓인 곳에는 외지에서 찾아온 선비들이 구경하거나 시를 짓기 좋은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은 더욱이 운치가 있고 분위기가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작용함과 동시에 구름다리가 놓여 구름 운(雲) 자에 다리 교(橋)를 써 마을 이름이 된 것 같다.
구름 모양 돌다리의 당시 모습은 윗면 길이가 3m 너비, 2.5m 높이 0.5m의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하나의 바위였다고 한다.
이주민들에 따르면 그 바위는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 안길을 포장할 당시에 땅속에 묻혔다고 증언을 하고 있다.

운교에 살았던 성(姓)씨
운교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사람은 용담 염씨로 기록되어 있다. 용담 염씨는 신라 때부터 운교에 마을을 이루었고, 그 이후에는 염씨의 뒤를 이어 제주 고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운교마을이 수몰되기 전까지 이 마을에는 김해 김씨를 비롯해 전주 이씨, 제주 고씨, 기계 유씨, 강씨, 임씨, 조씨, 최씨, 백씨, 안씨, 정씨, 신씨, 한씨, 변씨, 장씨, 황씨, 길씨, 박씨, 육씨, 문씨, 양씨, 허씨, 염씨 등이 오순도순 살았다고 한다.

동학란의 거점지역 ‘용강산’
운교마을에서 바라본 동쪽에는 용강산 줄기의 등성인 달기재가 있다. 달기재는 달계란 옛날 역이 있는 원월계로 넘어가는 큰 재였다. 또한 부암·성남마을을 지나 안천면과 동향면으로 이어지던 뱃길과 육로가 있던 곳이었다.
마을에서 바라본 서쪽에는 태고정이 있었다. 태고정은 현재 용담댐 건설로 망향의 동산에 새로 옮겨져 지어졌다.

용담댐으로 인해 수몰되기 전에는 태고정 고개를 넘어 신정마을과 원와룡, 영강마을에 이르렀다고 한다. 태고정 고개의 왼편으로는 정천면이 자리잡았고 오른편에는 주천면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 두 곳을 이어주는 길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남쪽에는 매봉이 보였다. 용담의 안산인 매봉에서는 옛날 매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매봉 기슭에서는 송림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용담에서 벼농사가 가장 잘 된다는 들이 서대들이었다. 그만큼 풍요의 땅이었던 것으로 잘 알려 졌던 곳이다.
북쪽으로는 용담의 진산인 용강산(龍崗山)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용강산의 높이는 400여m. 용담의 지명도 이 용강산의 용자와 월계리 황산에 있었다는 마산담의 담자를 사용해 용담 고을 지명의 되었던 산이기도 하다.

용강산은 용담팔경의 하나로 예부터 주민들로부터 사랑받은 산이라고 한다. 용강산에 걸린 가을달의 운치는 용담팔경의 하나로 손꼽았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보고 용강추월(龍崗秋月)이라 하였다고 한다.
용강산은 또 동학혁명 당시 거점지역이었다. 용강산은 동학란 당시 혁명군의 거점 기지로서 지금도 횃불을 밝혔던 봉화대가 존재하고 있다.
당시 무주와 완주, 금산, 진안 등 4곳에서 400여 명의 동학군이 집결해 관군과 격전을 벌인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 용담댐으로 인해 수몰된 용담면 소재지의 현재 모습
용담향교가 자리 잡았던 곳
용담향교가 용담댐으로 인해 용담면 옥거리에서 동향면 능금리로 자리를 옮겼다. 용담향교는 고려 때 창건되었다.
용담향교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향교의 명륜당은 학생을 가르치던 학교의 교실이었다.

또한 고을의 큰 행사를 통해 미풍양속을 전수하던 예절의 실천도장이었던 곳이다.
용담향교는 고려시대 공양왕 1392년 현령 최자비에 의해 중건하였으며, 공자를 비롯해 사성사현과 한국의 18현을 봉안하고 있다.
용담향교는 병자호란으로 불탔으나 고계춘과 유림 구순 두 사람이 위패를 수습해 주천면 운봉리 구봉산 바위 동굴 속에 옮겼다.

고계춘은 당시 고재석(전 정천면장)씨의 선조이다. 고계춘은 자는 춘명(春明)이며 호는 석당(石塘)이다. 고계춘은 1552년에 출생해 1618년 6월 1일에 세상을 떴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용담향교는 1634년 새로 지어 위패를 봉안했는데 중수, 중건을 여러 번 거쳤다. 1552년 중수이후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대성전이하 양산재, 시습재, 내외삼문 등이 퇴락했다. 1984년 10월에 그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용담향교의 건물은 외삼문, 명륜당, 비각, 동재(시습재), 서재(양산재), 제기고, 대성전 등이 있다.
외삼문은 맞배기와 지붕 3칸의 대문이며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또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1990년 건립됐다. 동재(시습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기숙사이다.
서재(양산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내삼문은 3칸의 대문이다. 제기고는 정면 1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이며 제사 지낼 때 쓰는 그릇을 보관하여 두는 곳이다.
한편,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호로 1984년 12월 10일 지정됐다.

면소재지 '운교'
용담 운교마을에는 용담초·중학교, 면사무소, 농협, 우체국, 소방서가 자리를 잡아 용담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용담초등학교는 용강산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용담초등학교는 용담현의 객사 자리에 위치했다. 객사의 안과 중안에는 ‘전하만세’란 글자를 봉안하고 신임 수령이 참배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나라의 애경사시에 현령이 민관을 대동해 대상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연고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절을 했던 곳이다.

또한 용담초등학교는 귀빈을 응대하던 동대청과 서대청이 있던 곳이다. 객사를 헐고 운동장을 확장하는데 면민이 모두 나서서 평떼기를 마을별, 개인별로 작업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용담중학교는 용담면 옥거리 287번지에 위치했었다. 1957년 5월 14일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1976년 2월 4일 9학급을 편성하였고, 교무실, 서무실, 교장실, 과학실, 음악실, 컴퓨터실, 상담실, 가사실, 숙직실, 관사, 화장실(변소), 창고, 테니스장, 급수대, 우물, 교재원 등이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용담면사무소는 진안군에서도 유일하게 기와집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네모난 주춧돌, 네모기둥에 팔작지붕이 멋스러웠다고 한다.
용담면사무소는 현령이 현의 행정과 사법을 총괄하며, 육방관속(지방 관아의 육방에 속한 구실아치: 각 지방의 행정을 맡아보던 관아로 조선 시대에 승정원 및 각 지방 관아에 둔 여섯 부서로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을 뜻한다. 또 조선 시대에 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을 뜻한다.)을 통제하던 관헌인 동헌(지방 관아에서 고을 원(員)이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 및 그 밖의 수령(守令)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이다.

면사무소는 현령의 집무처였다. 수몰되기 전 용담면사무소는 1920년 백두산의 소나무를 뗏목으로 압록강을 이용해 운반한 재목을 가지고 지었다고 한다. 면사무소의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칸마다 창문이 하나씩 나있었다고 한다.

역대면장은 고영민, 임면장, 변대규, 임연상, 박동식, 문학만, 김세환, 김봉준, 방영선, 고영호, 방영선, 고영호, 유성근, 정해천, 창만호, 고재석, 김호연, 김지수씨 등이며 김장영 면장이 수몰되기 전까지 근무했다고 한다.
변대규 면장은 과묵해 한번 웃으면 풍년이 든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변 면장 시절에 면사무소를 건립했다고 한다. 박동식 면장은 국회의원에 두 번 나왔던 인물이며, 방영선 면장은 김제, 익산 군수를 역임하였다.
역대 면장 가운데 박동식, 문학만, 김세환, 방영선, 고병호, 고영호, 유성근, 창만호씨 등 8명은 상거마을 출신 면장이다.
김광성(당시 상거마을. 용담출신 전 군의원으로 4선 역임)씨는 “용담면에 역대 면장 가운데 8명이 우리 마을 출신 면장이었으며 방영선씨는 면장을 역임하고 완주군수와 군산·김제 부시장을 역임하였다.”라면서 “고재열씨는 진안·장수·고창 군수를 역임한 인물들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용담농협은 진안, 마령 용담에 설치한 금융조합에서 시작했다. 문종엽·문참사는 금융조합 조합장이었다. 그 뒤로는 농업은행을 거쳐 면 농업협동조합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용담 단위농업협동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용담 단위농업협동조합은 전북도지사로부터 저축공로 상을 수상했다. 그 후 용담농업협동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역대조합장으로는 김진무(1972년 9월부터 1975년 4월까지), 김치병(1940년생. 1975년 4월부터 1981년 4월까지), 박병국(1935년생. 1981년 5월부터 1984년 4월까지), 방희선(1932년생, 1984년 5월부터 1994년 2월까지) 마지막 조합장으로는 박병국씨이다.

용담 우체국은 용담 현령이 있을 당시 길청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우체국을 새로 지으면서 당시의 건물로 마이산 탑사를 지었다고 한다. 길청이란 현령의 육방관속중 이방과 예방 그리고 집사의 집무처였던 곳이다.
용담우체국은 1909년 개설하였다. 이때 서울, 전주의 우편 송달은 3일 걸렸다. 1976년부터 가정에 전화가 놓이게 되었다.
또한 용담 운교마을에는 소방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방서에는 전문적으로 불을 끄는 소방관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 조성운씨
인터뷰  … 수몰 전 마을이장 조성운씨

용담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의 이주민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어려웠지만 수몰되기 전이 더 좋았다.”라고 그 시절을 회상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또 다른 이주민들은 “농촌에서 부채로 힘들었는데 그나마 적은 터를 보상받아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고 말을 하지만 “수몰되기 전에 문방구 및 서점 운영할 때 만난 학생들이 지금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위 두 증언을 볼 때 용담댐이 꼭 주민들에게 피해를 안겨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주민들의 대다수의 증언은 용담댐으로 실향민이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호소했다.
북에 고향을 두고 떠나온 실향민들은 북에 고향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찾아 갈 수 있다. 하지만 운교마을을 비롯한 수몰지역은 찾아가고 싶어도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된 것이다.

운교마을에 살았던 조성운(64. 당시 마을 이장)씨는 용담댐으로 수몰된 고향을 등지고 용담면 송풍리 옥수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조 씨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고향이 없다는 심리적인 위축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향에 태어나 잔뼈가 굵고, 이웃사람들을 만나 서슴없이 지내던 그 시절 생각이 많이 나죠. 산을 사이에 두고 지내던 곳이지만 운교마을과는 차이가 느껴져요.”
조씨의 말은 지역주의가 아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고향에서 함께 지내던 선·후배와의 만남에서부터 마음을 나누던 정이 그립기 때문이다.

운교마을에 살았던 실향민들이 모임이 1년에 한번 모임을 갖는다.
“고향을 떠나 타도타관에 살고 있는 고향 선·후배가 1년에 한번 모임을 갖고 있어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100%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60~70%는 참여를 하고 있어요.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모임하면서 옛날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운교마을은 향교를 비롯해 면사무소, 농협, 초등학교, 중학교 등이 존재해 인근 마을에 선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고 조성운씨는 말한다.
“우리 마을에 기관이 밀집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임마을이 되었어요. 수몰되기 전 제가 이장을 보았는데 4~5개 마을이 모여 있어도 선임 이장 자리는 항상 운교마을 이장이 보았어요. 그만큼 운교마을이 중심이 되었죠.”

조성운씨가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군에서 이주민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군청에서 수몰민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타 지역으로 떠나지는 않았겠죠. 이주민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었나 싶어요. 향교 주위에도 이주할 수 있었는데 자리 마련을 하지 않은 것이죠. 향교 주위가 아니더라도 어디든 자리를 마련할 보상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현재 진안을 보면 잘 알 수 있잖아요. 인구가 줄어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을요. 그 당시 이주민을 잡아두었다면 지금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지는 않았겠죠.”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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