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올 봄, 진안고을 사람들 책바람이나 나볼까?"(28)

▲ 엮은이: 모심과 살림 연구소, 출판: 그물코
헬기로 농사지으면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는 구시대의 아름다운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헬기로는 절대로 델몬트를 이길 수 없고, 카킬을 이길 수 없다.

6 헥타르의 땅을 헬기로 농약 뿌리는 1970년대 미국 농업방식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지우면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는 투기꾼이 아니고 또한 공업화와 산업화를 지켜낸 대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지혜롭다.
아직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에는 농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

책표지에 있는 선언과도 같은 말이다.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과거 4천년 동안 하루라도 농업을 아니하고 살아 본적은 없었습니다."
1932년 일본이 홍커우공원에서 전승기념식을 할 때 폭탄을 던졌던 윤봉길의사가 야학교재로 사용하던 '농민독본'의 내용을 첫머리에 실었다. 읽으면서' 이상도 하지, 1932년이면 75년이 되어가건만 그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지.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지. 핸드폰 팔아 쌀 사먹겠다는 판인데…'

어느날, 도시에서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느닷없이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내려오기도 하고, 어느 날인가부터 보이기 시작한 공중에 떠 있는 현재의 삶의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신골로 내려온 사람들이 쓰는 땀에 절은 이야기들이다.

생명의 뿌리인 농업을 다시 이야기 해보자고 서두를 뗀다.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우리는 자칫 농사를 다 아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굳이 듣지 않아도 아는 이야기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들어야 한다.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모대부터 지어온 농사를 될 수만 있다면 버리고 피하려 도시로 나가려 할 것이니까.
쓰노 유키노란 일본인이 소년시절에 겪은 일화 하나.

2차 대전 당시 그는 중학생이었고 학교에서는 일본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 승리를 믿었다. 그런 어느 날 마을어른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이 미국에게 반드시 질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애국심에 가득 찬 소년은 어른들에게 항의하였다. 그 때 소년의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말-

“봐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가위는 20년 전에 선물 받은 미국산 가위인데 이렇게 멀쩡하다. 이렇게 튼튼한 강철과 용수철을 이미 오래 전에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일본에 질 리가 없지 않는냐”
그리고 그 소년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드려야 했다. 소년의 세대가 믿고 있던 정보가 몸으로 체험한 어른들의 경험과 지혜를 뒤따를 수 없었음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유무역과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출현한 전 지구적 시장을 인류사회의 진보로 선전하고 있지만 내 것이 기반이 되어있지 않은 시장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의존하는 미국시장은 우리를 포함 100여개의 나라가 의존하는 시장으로 세계곡물의 3분의 2가 그 땅에서 생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90%를 수입하고 있는데, 지금 미국농지의 13%가 연간 1 에이커당 (1,222평) 5톤 이상 침식을 당하고 있어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생산을 할 것인지, 토양보전을 위해 생산을 조절할 것인지 논의 중에 있다.

어떠한 희생이란 계속되는 농약사용에 대한 땅의 지력약화와 더욱 강해지는 해충의 저항력에 더욱 강력한 농약을 쓰는 것을 의미하고 비용의 증가를 감수하고서라도 라는 말인 것이다. 비용증가는 당연한 곡물가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고.

간단히 말해서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나 멀지 않는 내일에 미국에서 우리가 원하는 곡물을 사올 수 없게 될 것이란 것이다. 열심히 핸드폰을 팔고 칩을 팔아 외화를 많이 번다해도 쌀을 팔 나라가 없다면 아니 팔 쌀이 없다면… 이라는 암울한 메시지인 것이다.

어찌 미국뿐이랴, 공업입국을 향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중국이 언제까지 값싼 농산물을 팔게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숲에서 일하는 사람인바 이렇게 말해본다. 우리가 돈을 주고 나무를 사올 수는 있지만 숲을 사올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농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현존하고 있는 농사꾼들- 노인들, 그들을 가리켜 농사명인이라 부르던 천규석선생님의 말씀이 절절이 옳다는 생각이 이 순간에도 든다. 이 다 죽고 나면 어디 가서 그 오랜 농사기술을 배울 수 있을까. 기계로 갈아엎고 농약 치고 하는 농사 말고 땅심이 약해지면 무슨 거름을 주고, 순은 어떻게 따주고, 북은 얼마나 쳐올리고, 잎사귀를 보면 무엇이 모자라는지 알아내는 그런 기술 말이다.

시골에서 제일 큰 문제는 교육이다.
농업을 가르치는 학교는 농촌에 없고 농업대학도 도시에 있다. 그래서 시골아이들도 과외열풍에 함께 뛰고 있는 판이다. 아쉬운 대로 교육만 믿을 수 있다면 굳이 농촌을 떠나지 않을 부모도 많다. 그러나 그런 학교를 만들기에 앞서 부모들이 인생에 대한 성공에 대한 가치와 인식을 바꿀 수 있다면 고민도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 진안에는 특히 생명과 행복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결과로 생활터전을 옮겨온 이들이 골골이 살고 있다. 우선은 그들을 그저 보아주는 눈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백성이라 불렸던 옛 농민은 백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자였음에서 백성이라 하였다는 풀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자인은 우리 진안 사람이다.

그가 주장하는 지역자급은 귀 기울여 볼만하다. 여러가지 대안 중에서 선생님이 함께 사는 마을과 직장이 있는 곳에 사는 공직자들은 본인들에게는 거슬릴지도 모르지만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싶다.
수업이 끝나고도 마을에 있는 선생님이라면 당연히 제 자녀도 마을학교에 다닐 터이고 그러니 자연 학교에 있는 시간만이 아닌 전일 교육이 있을 것이고, 공무원들 또한 지역의 불리함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상향하려 애쓸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질 좋은 교육자, 수준 높은 교육환경을 함께 모아 의논할 터이고 어디 농사꾼만 살아야하는 농촌이란 말인가.
지금은 다 자란 아이들이 서울에 있지만 나 자신도 시골로 내려올 때 초, 중등생이던 아이들 다 데리고 내려왔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부모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학교에서 하는 교육만 교육이 아닌 것 같아요. 부모옆에서 배우는 게 더 많을 수 있지 않을까. 부모가 땀 흘려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와 돈만 올려 보낸 아이는 다르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일 년 하숙비가 이삼백 들거면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넓은 세계를 배우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군단위에서 고교를 마치게 했던 부모인 나는 이런 말,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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