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람

▲ 김영보씨
김영보씨

주천면 주양리 양지마을 출신
천주교 강남지역 논현지구 한마음회 총무
市友會(서울시청공직자모임)남양주 지부장
광산김씨 청년회 부회장
재경주천면향우회 부회장

가는 길/어제도 한 두 밤/나그네 집에/가마귀 가왁 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십리/어디로 갈까/산으로 올라갈까/들로 갈까/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정주, 갑산/차가고 배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저 기러기/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 가?/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열 십 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대 갈대 갈린 길/ 길이라도/내가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서정의 시인 소월만큼이나 서정의 인생을 살아 온 김영보씨, 그의 인생도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서정이란 말 자체가 감정이나 태도등의 인간의 정서를 드러내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한반도에 식민통치를 강화하던 그 시기, 조국의 암울한 하늘의 운기(運氣)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당시 그의 집안은 부모들이 운영하였던 정미소 사업이나 제재소 사업 등의 규모로 짚어 보아 남부럽지 않게 풍족한 산골에서는 내노라 그렇게 행세하며 살아왔다고 김영보씨는 기억한다.

나라가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어 정부가 서고, 하고많은 무질서의 무정부 상태를 지나서 좌우의  어지로운 논쟁을 거치고,   민족상잔(民族相殘)이라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산골구석에 까지 불어 닥친 정치바람에 그의 집안도 그렇게 함몰되어 갔다. 아버지와 형제들, 삼촌들 까지 뛰어 든 정치집안에서의 그 권태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낸 김영보씨는 그가 느낄수 있었던 자연 속의 자유를 만끽하며 어쩌면 필연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정신세계 속에 역마직성(驛馬直星)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보씨의 어린 그 시절의 그 역마직성은,  그가 자라면서 사춘기와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그 시절을 보내면서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와의 사별에서 받은 그 충격으로 인하여 가슴에 작은 응어리로 간직되어 간다.  금산중을 거쳐 금산고등학교의 밴드부에서 그는 결정적으로 그의 인생의 끼를 겸한 낭만을 얻는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순서와 단계에 따라서 그 시기에 요구되는 적기의 단계를 맞추어 각 단계마다 충분한 준비와 절차를 지켜가는 그 순서를 그는 뛰어넘고 있었다.

그의 인생역정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반칙은 이때 벌써 그는 한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그 시절(時節), 하기 어렵다는 한동네 소녀와의 열애에 그가 빠진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시도한 모험 이였다. 시계도 흔치 않았던 그 시절,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그 시절 그 산골에서 그들은 교회당의 저녁예배 종소리에 맞추어 뒷동산 묏동에서 만났었던 그 소녀가  지금 그의 아내 소병윤(주천.61세)여사였었다며 김영보씨는 지긋이 눈을 감고 먼 그날을 회상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겁 없었던 시절의 지금 생각해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았던 그런 세월 이였다고  그는 술회한다. 이들은 이렇게 7년, 갖은 박해와 감시 속에서 순교하는 마음으로 연애에 성공하여 결혼하고 두 아들과 딸 하나 잘 길러 제 각각 갈 길로 내 보냈노라고 흐뭇해  한다.

김영보씨의 역마직성에 두 번째 불을 지펴 준 것은  그가 군복무 시절 만났었던 상급자로 모시고 있었던 군악대의 선배를 만난 사건 이였다. 그 당시 해마다 천호동의 유흥가에는 천호 콩쿨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김영보씨는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 1등을 했고, 우연치 않게 그날 그 자리에서 만난 군악대의 선배는 캬바레를 운영하고 있었던 그 분야의 대부로 군림하고 있었다. 김영보씨 그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된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이셨던 의학공부 하여 의사되는 그 길을 뿌리치고 인생의 방황하는 역마직성의 길에서 헤매고 헤매서 여기까지 왔음이 한(限)으로, 또 추억의 한 부분으로 그의 가슴에 남는다. 명문가의 체통을 강조하시던 부모님의 그 영혼 앞에 그는 사죄한다. 엎드려 눈물로 사죄한다.

김영보씨가 서울시청의 공직자로 20여년의 세월을 지키면서 많고 많은 그 이상한 유혹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것들도 부모님의 그 유훈(遺訓)과 가문의 그 체통과 또 하나 그 아내의 절제된 인고(忍苦)의 결과였음을 그는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후 영진건설의8년여와 지금 시우건설(市友建設)대표로서의 이 활동에 긍지를 갖는다. 가끔씩 길을 가다 지금은 없어진 시골교회  종탑의 흔적을 발견 할 때면 뭉클하게 그 시절 뒷동산 묏동의 친숙하고 편안한 추억에 젖어진다. 그것이 무서움이거나 죽음의 이미지에서 보다는  그의 삶의 한 부분에서 아름답던 추억의 일부분으로 그것이 산으로 향한 무한성의 한 배경으로 그의 매마르지 않는 한폭의 풍경화 되어 남아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의 고향사람 김영보 씨. 인생 70의 연륜을 내일 모레 하는 그가 많이 후배를 고향 향우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여 두고 그를 보좌하여 부회장으로 활동 하는 그의 고향사랑의 모범, 그는 오늘도 주체 할 수 없는 끼, 그리고 필연일 수밖에 없음을 확신하는 역마직성의 그 한계 앞에서 오늘도 그는 그 향우회의 사회봉을 잡는다. 고향 선배의 칠순잔치에서는 추억의 소야곡을 불러댄다. 철없던 그시절돌아가신어매를생각하며비내리는고모령을 오늘도 불러 쌓는다.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오/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넘어오던 그날밤이 그리웁고나./
그는 사후(死後)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김영보씨 전화번호 019ㅡ212ㅡ8985]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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