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13) 성수면 구신리(마지막) … 원구신

▲ 마을 약도
이제 성수면 구신리의 마지막 마을을 돌아볼 차례다. 지금까지 살골, 염북, 장성 세 마을을 둘러봤는데 각각의 마을은 같은 법정리에 속해 있어도 참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원구신 마을에 대한 기대도 컸다. 구신리라는 법정리 이름을 따온 마을이기도 했고, 마을에 전해지는 흥미로운 전설이 기록에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제헌절이었던 7월17일에 찾은 원구신 마을. 구름 낀 하늘에서는 간혹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백운면 덕현리에서 성수면 구신리로 접어들어 만나는 첫 마을이 원구신 마을이다. 도로 아래쪽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마을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한 지 얼마 안 된 듯 검은색이 짙었다.

특히 원구신에는 대나무 숲이 군데군데 보였다. 도로 위와 마을 입구 양쪽으로 숲을 이룬 대나무 군락이 눈에 띈다. 대나무는 따뜻한 곳에서만 자란다고 알려져 있는데, 원구신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기온이 그리 낮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 원구신 마을 뒤 도로 가에서 바라본 마을
◆신하를 구한 ‘구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임실 상이암에서 진안 속금산으로 가다가 신하를 구했다고 해 ‘구신(求臣)’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구신리의 본래 마을이란 뜻으로 지금의 ‘원구신’이 됐다고 한다.
이 마을은 전주 이씨와 탐진 최씨 등이 정착하면서 이뤄졌는데, 여러 성씨가 정착해서 이뤄진 만큼 지금도 각성바지이다.

한 때 서른다섯 집 정도가 살았는데, 지금은 스무 집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열네 집이라고 한다.
마을 앞으로 넓은 뜰이 있어 벼농사를 많이 짓는 이 마을은 예전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 정도로 잘 살던 마을이었다. 다른 마을과 달리 대부분의 집이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 대부분이 자녀를 대학까지 공부시켰다고 한다.

그만큼 잘 살았고, 인심이 좋았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마을엔 이제 노인들만 남아 옛날 같은 활기를 찾아볼 수 없다. 마을에서 60대 안팎인 주민들이 청년이라고 한다.

마을에 들어가 처음 만난 기윤도(79)씨는 북적거렸던 마을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 마을은 각성바지예요. 그런데도 참 사이 좋게 가족처럼 잘 지내는 마을이죠. 그런데 계속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몇 집 안 남았어요.”

▲ 마을 가운데 있는 경로당이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경로당 가운데 하나다. 오래된 만큼 마을에서는 몇 차례 개축을 했다고 한다.
◆낡은 마을회관과 우물
마을 중앙에는 지은 지 꽤 돼 보이는 경로당이 있고 그 옆에 공동우물이 있다.
농번기인 요즘엔 사람들이 경로당을 찾지 않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최근에 사람들의 왕래가 없었던 것 같다. 원구신 경로당은 인근 마을 가운데에서도 가장 오래된 경로당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 파손된 곳이 있어 개축을 했다고 한다. 보통은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에 마을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경로당 옆에 있는 우물은 잘 정리돼 있었다. 지붕도 있고, 주위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그런데 이 우물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마을 공동우물을 사용하기 편하도록 콘크리트로 바닥을 깔고 정리했는데, 무엇을 잘못 했는지 하천물이 섞여 들어간 것이다. 그 뒤로는 이 우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관정을 파서 지하수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지하수를 이용하기 전 원구신은 인근 마을과 마찬가지로 물이 부족했던 마을이었단다. 특히 농사철에는 농업용수가 늘 딸렸다. 옛날에는 내동산 양품봉 날망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당시 인근 마을이 연합해서 기우제를 지냈던 것과 달리 원구신은 자체적인 기우제를 올렸다.
여하튼 지하수를 사용한 뒤로는 물 걱정 없이 지낸다고 하니 다행이다.

▲ 경로당 옆에는 마을 공동우물이 있다. 좋은 물이 나오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현대식으로 고친 뒤로는 하천 물이 섞인다고 한다.
◆마을 앞 작은 동산 ‘동뫼’
마을 앞에는 조그만 동산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동뫼’라고 부르는데 ‘동네 산’이란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동뫼 근처에서 만난 하장호(65)씨는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의 만류에도 이 산에 묘를 쓴 것이 마을의 기운을 쇠퇴하게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사람이 모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을에 살지 않아요. 당시에 사람들이 동뫼는 풍수상 묘를 쓰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묘를 썼어요.”

어떻게 보면 동뫼는 마을 앞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걸러내는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뫼에 있던 정자나무와 마주보고 있는 다른 정자나무는 마을의 정문이었다고 한다. 보통 마을의 입구에는 장승을 세워 나쁜 기운을 쫓곤 했는데, 원구신은 동뫼가 그런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 작은 동뫼를 애지중지 했다. 실재 옛날에 마을에 살던 한 주민은 이 산에 있던 고목이 죽고 난 뒤에 소나무를 사다가 심었고, 잘 키워서 멋진 정자나무로 만들었다. 그냥 보기에도 정자나무와 동뫼는 마을의 문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동뫼 옆에는 ‘김씨열녀비’라는 비석이 하나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주위로 철제 울타리를 쳐 놨는데, 녹슨 것으로 봐서는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인근 장성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역시 효자, 효부가 많았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 마을 뒤 도로가에 대나무가 숲을 이뤘다. 원구신마을에는 대나무 숲이 몇 군데 보이는데, 마을의 기후가 온난해 대나무가 잘 자라는 모양이다.
◆이무기 승천한 노적바위
동뫼 옆에는 나무로 지은 정자가 보인다. 원목 그대로를 기둥으로 삼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을 흙으로 막아놓은 것이 참 운치 있다. 다만, 지붕을 보수하면서 덮어놓은 파란색 슬레이트가 눈에 거슬린다. 아마도 예전에 기와집들이 슬레이트로 교체할 때 정자 지붕도 함께 교체한 모양이다.
그 뒤로 바위가 보인다. 세로로 쪼개져 있는 바위틈은 나뭇잎과 쓰레기로 차 있었다. 주민들 얘기로는 그 틈 아래로 널찍한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그 구멍에서 커다란 구렁이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마을 정자 근처 논두렁에서 잡초를 제거하고 있는 김강영(64)씨. 이렇게 풀을 베주어야 풀이 논으로 세력을 뻗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단다.
◆맛있는 쌀 나는 곳
산으로 둘러싸이고, 앞에는 수구막이 구실을 하는 동뫼가 있다. 마을 앞으로 물도 흐르니 원구신은 사람이 살기에 좋은 마을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주변 환경 때문인지 원구신에는 장수하는 노인이 많다고 한다. 지금도 80∼90 노인이 여럿 있다고 한다.

게다가 마을 앞뜰에서는 벼농사를 많이 짓는데, 전국 어떤 곳의 쌀보다 품질이 좋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쌀을 수확해보면 다른 지역 쌀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밥을 해 놓으면 그 맛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이 마을로 찾아와 쌀을 많이 사갈 정도라고 한다.
환경도 좋고 먹거리도 풍족한 살기 좋은 마을 원구신 마을 사람들은 이웃간에 훈훈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 마을에서 처음 만난 주민 기윤도(79)씨.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밭으로 일나갈 차비를 하던 중이었다. 기윤도씨는 많은 마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 원구신 마을 정자 뒤에 있는 노적바위.갈라진 틈으로 장군이 나왔다는 얘기와 이무기가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정자 한 채가 있다. 그리고 그 정자 뒤로 세로로 쪼개진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것을 ‘노적바위’라고 부른다.
기록에서는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동뫼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고, 그 옆에 노적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노적바위에는 하늘에서 벼락을 쳐 바위가 깨져 장군이 소를 몰고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구신’이란 마을 이름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신하를 얻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이 마을에 있는 바위에서 장군이 나왔다는 전설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바위에서 소를 몰고 나왔다는 그 장군이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태조 이성계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할 것도 같다.

마을 주민들은 또 이런 이야기도 했다.
“노적바위 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옛날 어른들 말로는 거기에 큰 구렁이하고 뱀이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그 구멍에서 커다란 구렁이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도 있어요.”

아마도 이무기가 용이 돼서 승천했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이야기 역시 ‘왕(王)’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용은 임금을 뜻하고, 승천은 기운이 상승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이 이야기 역시 태조 이성계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정확한 이야기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채 전설로만 남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서 이 노적바위가 마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 마을 정자. 뒤에는 많은 전설이 담긴 노적바위가 있다. 기둥과 지붕에 사용한 나무 색이 바랜 걸로 봐서는 지은지 오래된 것 같다.
▲ 마을에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김씨열녀비이다. 닳고 닳은 비석의 모양이 긴 세월을 서 있었다고 말해준다.
▲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논밭 한가운데 있는 정자나무. 들에서 일하는 주민들의 쉼터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에서 본 가장 큰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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