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여름더위 게 섰거라! 책 부채 나가신다" (31)

▲ 지음: 이문재 출판: 호미출판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한다지만 나는 가을에 책이 잘 읽어지지 않는다. 아니 책읽기가 아깝다. 가만히 둘러만 보아도 눈 가득 , 코 가득, 가슴 가득 파고드는 자연의 그 유혹적인 손길에 그만 나를 무너뜨리고 싶어질 뿐이다.

한 번 정해지면 다시 들춰보지 않는 게 우리 대중들의 습성인 바 가을은 독서의 계절? 참으로 그런가 생각해 볼일이다.

진짜 진짜 무더운 날 온몸에 물 한바탕 뒤집어 쓴 다음 정말 자신의 입맛에 꼬옥 맞는 책 한 권 집어 들고 바람 통하는 거실이나 서늘한 골방을 찾아 들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보라.

요즈음은 인적 없는 산골짜기에 차를 대 놓고 창문을 열어 놓고 ( 에어컨을 틀어도 좋겠지) 맘 먹고 들고 온 책 몇 권에 고개를 파묻는 책벌레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이문재 산문집은 그런 삼매경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내 의사는 아니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휴가지에서 손에 들고 간간이 생각의 켜를 헤집어 볼 수 있는 읽을거리로 안성마춤이다.
그는 잠시 뒤돌아본다.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더듬으며 그것 대신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에 따라 변해가는 우리네 삶의 변형되어 가는 모습을.

부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에어컨이 들어섰다
골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형쇼핑몰이 들어섰다.
이것은 단순한 즉물적인 변화만이 아니다. 부채는 사방이 두루 트인 공간에서 일으킨 바람의 운동에 우리 모두 함께하는 것인데 반해 에어컨은 켜기 전에 먼저 사방 문을 다 닫아 열림을 차단한다.

그들이 즐기는 냉기대신에 밖으로 내뿜는 열기는 책임지지 않는다. 이런 열림과 폐쇄의 극한 대립적 상황에서 당연히 우리의 자세도 반응이 다르다.
제사상을 차리면서 이 다음에는 누가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인가라고 짚어보는 그가 말하는 누가는 그의 자식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다림이 없어진 시대에 사는 우리의 조급증과 쉽게 들어서는 망각증에 대한 근심으로 읽힌다.

걷기를 잃어버린 사람들, 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이 생략된 음식을 먹으며 웰빙을 찾는 사람들, 이문재가 꺼내든 것들엔 철렁한 그리움이 드리운다
우물청소, 등목 (나는 등멱이라 알고 있는) 냉면이 던져주는 그리움들.

백화점, 출구없는 왕국은 우리의 무심한 일상이 얼마나 치밀하고 은밀하게 계획된 자본의 덫에 걸린 벌레들인가를 실감나게 한다.
좋게 말해서 성공적인 판매전략인 그 그물망은 설계도에서부터 우리의 지갑문을 열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대형백화점, 이 소비의 궁전은 건물 자체에서부터 층별 배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의 역전, 출구 감추기, 소음과 음악, 미로와 같은 동선, 단정하고 세련된 의상/ 표정의 점원(주로 어린들을 겨냥한) 문화 공간, 스포츠 센터 등의, 다양한 그러나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소프트웨어들을 가동시키면서, 소비자들로 하여금 최대한의 소비를 ‘강제’ 한다. 백화점은 그 건물 자체부터가 소비의 강력한 호르몬 주사이다.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소비의 덩어리들은 저 호르몬 주사를 기꺼이 맞아대면서 , 소비는 오로지 소비자만의 주체적인 선택/권리이며, 소비/ 구매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라고 믿는다.”

아- 우리는 우리가 만든 수많은 덫에 걸려 있는 줄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며 힘든 날개짓을 해대는 한 마리의 나비들에 불과하다.
그가 소개하는 ‘녹색평론’ 이라는 잡지. 나도 처음 이 잡지의 독자대열에 끼기 시작하면서 품은 의문이다.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저 넓은 바다에 던지는 돌멩이의 파문과 같은 이런 자각의 외마디를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돌멩이의 파문을 민감하게 건져 올리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찾았을 때 가슴속에 점차 부풀어오는 느껴움으로 한동안 그들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기도 했었다. 그런 게 희망이 아닐까. 결코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위안으로 힘을 얻기도 했다. 이제 그는 ‘녹차마시기’를 권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감히 다시 입에 올린다.

진정한 선배, 혹은 진정한 친구는 상대방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녹차에는 기다림이 있다. 이 기다림이 마음을 다스린다. 녹차마시기는 자발적 망명 이라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요즘 들어 나 또한 손전화를 가지게 되면서 기다림을 잃어버리는 자신을 자각한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