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과 행인 끊이지 않던 서낭댕이재
상인과 행인 끊이지 않던 서낭댕이재
  • 점필정 기자
  • 승인 2007.08.10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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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15) 백운면 남계리(마지막) … 남퇴(원남계ㆍ분토동)

▲ 원남계 마을 전경. 마을에 나무가 많아 주택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본래 이 마을은 뒷산 넘어 오른쪽에 있다가 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남퇴(南兎)마을에는 남계, 분토동, 시묘골(주민 가운데는 서당골이라고 말해 준 이도 있다.), 용정골이란 이름을 가진 자연마을 네 개가 있었다. 지금은 원남계와 분토동(주민 가운데는 ‘분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두 개 마을만 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원남계라는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500여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주 강씨가 정착하면서 이뤄졌다는 이 마을은 본래 ‘계자치(鷄子峙)’라고 불렸는데, 화재가 자주 나고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 지금의 ‘원남계(元南溪’)라고 바꿔 불렀다고 한다. 원남계라는 마을 이름의 뜻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내가 흘러 붙여졌다.

분토동은 순천 박씨가 정착하면서 만들어졌다. ‘분토동(奔兎洞)’이란 마을 이름은 분토망월혈(奔兎望月血)이란 마을 뒷산의 형세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는데, ‘토끼가 달을 맞이하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주민들은 ‘분토’라는 이름보다는 ‘분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원남계에는 25가구 정도가 살고 있고, 분토동엔 네 집만 남아 있다. 두 자연마을 모두 노인 인구가 대부분이다.

▲ 동창리에 있는 남퇴마을 이정표
◆남원·임실로 가는 길목
남퇴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지난주에 찾아갔던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과 전혀 달랐다.
일단 동창리로 들어가 동남교를 건너 들어가야 한다. 동창리 교차로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잘 보면 ‘남퇴마을 2.5km’라는 키 작은 이정표가 있다.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가장 먼저 길 왼쪽에 보이는 마을은 ‘용정(龍井)골’이란 이름이 있는데, ‘우물에서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용정 맞은편에 외딴 집이 보이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은 ‘시묘(侍墓)골’이란 이름이 있다.
용정을 지나면 길이 다시 두 갈래다. 오른쪽은 남퇴마을에서 가장 큰 원남계로 들어가는 길이고, 왼쪽 길은 한참을 더 가서 분토동으로 이어진다.

남퇴마을은 예전에 진안, 장수, 무주 사람들이 남원이나 임실로 갈 때 지나는 길목이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서낭댕이재로 이어지는 폭 2m 정도의 길은 사람과 말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는 길을 따라 여러 주막이 있었고, 원골방죽 근처에는 행인들이 밤에 쉴 수 있는 움막 같은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원남계 맞은편 산 아래로 널찍한 길이 있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릇 만드는 흙 나던 곳
남퇴마을은 비교적 농경지가 넓은 곳이다. 동창리 방향인 북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은 그리 높지 않다. 그리고 골짜기가 넓어 논이 많다. 일부 경사진 곳에서는 고추와 인삼 등을 재배하고 있다.

그런데 농경지 곳곳은 흥미로운 지명을 가진 곳이 보인다. 질구지들과 점터라는 곳이 있는데, 질구지들에서는 질그릇이 나오고 점터는 옹기점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마을 주민들 얘기로는 남퇴마을의 토질이 아주 좋아 농사를 짓는데 좋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그릇을 만드는 점토질 흙이 지금도 나온다고 한다.
이 밖에도 원남계 앞 뜰은 ‘짐대거리’란 이름으로 불린다. 옛날에 불이 자주 나서 선조들이 화재막이로 짐대를 세워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무렵에 없어져 지금은 이름만 남아 있다. 일부 주민들은 살기 좋았던 남퇴마을이 쇠락하기 시점이 한국전쟁이라고 말하는데, 짐대가 사라진 시점과 비슷한 것을 보면 ‘액막이가 사라졌기 때문에’라고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농촌마을이 힘겨워진 것은 공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이농이 주요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옛날 원남계 마을의 경제력을 짐작케 하는 방앗간 시설
◆마을 곳곳이 명당자리
남퇴마을 곳곳은 풍수지리상 명당자리가 여럿 있다고 한다.
먼저, 원남계 마을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국이라고 하는데, 금계가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니 만큼 다산, 인재, 부유함 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원남계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데, 조금 과장하면 마을이 만들어지고 당뇨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다음 분토동은 앞서 얘기했듯이 분토망월혈이라고 불리는 지형인데, 이 역시 토끼가 밝은 달을 맞이한다는 의미는 번성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마을 주변 산 곳곳은 묘지가 많은 편인데, 시묘골 북쪽에는 공동묘지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명당이어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나 보다. 이곳에 묘를 쓴 자손들이 타지에서 성공해 잘 사는가는 몰라도, 남퇴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풍족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마을 곳곳에는 낡은 빈집이 여럿 보였고, 젊은 사람들이 모두 떠난 마을에서는 20여 년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명당의 기운마저 넘어서는 시대의 변화 때문에 힘겨운 우리네 농촌의 모습이다. 안타깝기만 하다.
 
◆자리 옮긴 원남계
본래 원남계는 현재 위치에서 뒷산 너머 골짜기에 있었단다. 위치로 보면 대략 시묘골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은 없지만, 150년 전에 예전 위치에서 지금 위치로 마을이 옮겨지면서 남은 집들이 ‘시묘골’로 불렸을 거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원남계 입구는 버스정류장과 남퇴마을회관이 마을의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 하루 두 번 버스가 들어오고, 백운면 소재지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마을 골목길은 모두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돼 있었고, 전체적인 모습이 참 정갈해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마을 초입에서 봤던 원남계와 마을에 들어가 보는 원남계가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초입에서는 마을 곳곳에 있는 나무 때문에 전체적인 마을의 규모를 알 수 없었는데, 마을에 들어서니 상당히 큰 마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한 때는 50가구가 넘게 살았다고 하는데, 마을 가운데에서는 방앗간으로 사용했던 낡은 건물도 볼 수 있었다.
 

▲ 원남계에서도 골짜기로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분토동. 옛날에는 이곳에 사람이 정착한지 100년이 넘도록 원남계에서 마을의 존재를 몰랐을 정도였단다.
◆한참 떨어진 분토동
분토동은 원남계에서 자동차로 5분 이상을 가야 나온다. 원남계에서 건너편 골짜기로 난 길을 따라 끝까지 가야 한다.
분토동으로 들어가는 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 길이 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은 논밭으로 이어지는데, 행기나무골 방향으로 나 있다. 행기나무골에서 더 올라가면 옛날에 임실군 성수면 갈골로 가는 뻣나무재라는 고개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 고개인데, 벚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도둑도 찾지 못하는 마을
자동차가 보급되고, 아스팔트가 깔린 새 도로가 나면서 남퇴마을은 큰 도로에서 한참 떨어진(자동차로 5분 거리이지만, 체감거리는 한참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외진 마을이 됐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그렇게 붐비던 교통 중심지였지만 말이다.

그 덕에 이 마을은 ‘도둑도 찾지 않는 마을’이 됐다고 주민들은 농담 섞어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동창리에서 길을 따라 꽤 들어가도 마을이 바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남계는 산 경사를 따라 품에 안긴 것처럼 쏙 들어가 있는데다가 마을에 나무까지 많아 주택이 눈에 잘 안 띈다. 어쩌면 금계가 알을 품고 있다는 지형 때문인 것 같다.

분토동은 더하다. 옛날에는 분토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100년간 원남계 사람들이 분토동에 사람이 사는 줄 몰랐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 지금도 사용하는 마을 우물
◆농촌 살리는 정책 필요해
“사실 우리 마을은 소재지와 5분 거리여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행정이나 금융 관련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잖아요. 이건 큰 문제에요.”
남퇴마을에서 30여 년간 이장을 맡아 일했던 양호철(61)씨를 만났다. 집 마당에서 아내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장마 뒤 햇볕에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양호철씨는 남퇴마을의 현실을 이렇게 얘기했다.
“진안 백운면 남퇴마을보다 서울 남퇴마을이 더 커요.”
양호철씨의 설명을 빌리자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주민보다 서울로 떠난 주민이 훨씬 많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20년간 아기 울음소리가 없었다고 하니, 오랫동안 이장을 맡아 일했던 양호철씨에게 마을의 현실은 매우 가슴 아픈 현실이었을 게다.

“무언가 정책적인 것이 필요해요. 단순히 무얼 지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농촌에서 농촌 사람들이 정착하고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해요.”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돌아본 마을. 넓은 들을 앞에 두고 높지 않은 산줄기에 안겨 있는 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기울어가는 농촌 현실에서 제대로 목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한 농촌의 현실을 생각하면, 영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이번 백운면 남계리 ‘우리 마을 이야기’ 취재를 마쳤다.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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