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윤영신, 서울타임스 회장

「짐(朕)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 영. 중. 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黃祖黃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 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들 일본의 하는 짓이 마지막까지 참으로 치졸하고 교만한 행태의 극치였지만 항복조서라고 보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본 천황의 그 종전조서는 그래도 1905년 을사오적(乙巳五賊: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대신 권중현)을 회유하고, 국가를 보위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약했었던 그 고종황제를 협박하여 칙재(勅裁)를 강요하고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던 을사조약(乙巳條約)과 우리의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헌병 경찰제를 강화하여 우리의 사법권을 탈취, 총리대신 이완용을 매수하여 1910년 8월 29일 조선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는 영구히 일본에 양여하다는 합병조약(合倂條約) 이후, 그 지긋지긋한 일본 36년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우리 민족 모두는 그래도 거리로 몰려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열광하고 환호한 것 이였다.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 2101호의 논설에서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오늘이여 목 놓아 크게 우노라.) 이라고 이렇게 통곡하는 마음을 내 놓고 있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저 개 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대신(參政大臣)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首席)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서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檀君). 기자(箕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삼천리 방방곡곡에 민족 모두의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진동한다. 김청음은 합방문서를 찢으면서 통곡하고, 정동계는 배를 가르고 자결한다. 천하의 유림들이 상소로서 항의한다.
민영환은 상소로도 뜻이 통하지 않으니 전 조선민중에게 유서로서 호소하고 자결한다. 식민통치 36년은 그렇게 하여 수많은 불행한 애국자(愛國者)출신 빈민군(貧民群)과 더 많은 행복한 매국노(賣國奴)출신 부민군(富民群)을 양산하며 귀족(貴族)과 평민(平民) 그 가계형성(家系形成)의 암묵적(暗?的) 철학(哲學)을 이 나라 이 민중(民衆)들에게 예시(例示)하여 주었다.

암울한 세월, 도산 안창호들은 나는 간다 나는 간다/너를 두고 나는 간다/잠시 뜻을 얻었노라/까불대는 이 시운이/나의 등을 내 밀어서/너를 떠나가게 하니/간다 한들 영 갈소냐/나의 사랑 한반도야/ 슬픈 거국가(去國歌)를 전국에 유행시키면서 그렇게 고국(故國)을 기약 없이 떠난다.
일제36년은 형극(荊棘)의 흔적(痕迹)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는다. 그 36년은 인고(忍苦)의 세월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그리고 그렇게 한숨 속에 세월은 갔다.
돌아오네 돌아 오네 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압박과 설움의 세월 36년, 고국의 산야(山野)를 그리면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행(苦行)의 망명(亡命)길을 걷던 이승만들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렇게 귀국선에 몸을 싣고 돌아온다. 우리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독립의 열매는 두고두고 이 민족의 목을 죄이면서 신탁통치 반대의 물결과 찬성의 배반 속에서 좌우의 극한적 대립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독립된 이 나라에 남북의 통일된 정부를 염원하며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38선을 베고 자결하겠다던 김구들은 소속 없는 흉탄의 제물로 하나 둘씩 그렇게 제거되어 갔다.

잘 못 정착되는 민주주의와 거기 재미를 느낀 독재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꼭두각시 놀음이 민중들에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우리가 깨닫는데 12년이나 걸렸다.
12년은 참으로 유머1번지 같은 그런 세월 이였다.

우의(牛意)와 마의(馬意)가 민의(民意)를 대신 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가 그 세월 속에는 있었다. 셋씩, 아홉씩 짝짓지 아니 하고는 투표장에 입장 할 수 없는 피라미드 민주주의가 꽃피우고 있었던 그런 12년 이였다.
민주제단(民主祭壇)에 피를 뿌리겠다고 다짐하던 조병옥들은 그 잘못 된 민주주의의 세월 속에서 민주주의에 관하여 회의(懷疑)를 제기하며 그렇게 사라져 갔다.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下野)하겠다. 민주주의 그 원본이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4월이 그렇게 왔다. 3월부터 여기저기 탑(塔)을 세우자고 그렇게 웅성거리더니 기어이 피를 본 것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이라고 우리 헌법 전문(前文)은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의 헌법이 얼마나 힘없는 공허(空虛)한 메아리 같은 것인가를 그 해 그 5월에 우리는 보았다. 새벽부터 웬 연속극인가 하였더니 그것은 역사의 책장을 넘기는 굉음(轟音)이였다. 시청 앞 광장에 전투용 장갑차가 모여 들었고, 국군들의 행렬이 전투대형을 이루면서 모여 들었다. 아, 아, 그 날 그 군화(軍靴) 발 자욱이 아직껏 우리의 역사에 씻겨지지 않는 흔적(痕迹)으로 남아 있어 우리 모두의 가슴에 무거운 숙제(宿題)로 다가온다.

조상이 살아 왔고 내가 살아 온 땅, 내일에는 우리의 아들들이 또 손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땅 대한민국. 대륙에 울려 퍼져가던 고구려의 기상을, 거기에 남겨져 있는 발해의 그 함성을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가끔씩 나들이에 나서서 중국을 보며, 일본을 보고, 그리고 러시아를 본다. 우리의 그 무능 했었던 왕조(王朝)시절 그들의 각축전(角逐戰) 사이에서 우리가 안았던 역사의 부담(負擔)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꼭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렇게 다짐해야 하겠다.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를 지우려는 그들의 음흉한 속셈을 우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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