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 (16) 진안읍 오천리(1) … 평촌

진안읍에서 장수군 천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오천리(梧川里)는 국도 26호선을 따라 평촌, 외오천, 원터(원촌), 동구점, 양지 등의 자연마을이 늘어서 있다.
오천리는 북쪽으로 진안읍 가막리와 상전면 주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 진안읍 죽산리와 물곡리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동쪽과 남쪽은 장수군 천천면이다.
오천리라는 지명은 ‘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가에 머우나무(머귀나무)가 많이 있다.’라는 뜻으로 ‘머우내’라고도 부르며, 마을이 바깥쪽에 있다고 해 ‘외오천’이라고도 불렸다. 이 가운데 ‘외오천’이란 지명은 바깥머우내와 원촌을 합한 행정리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 도로가에서 바라본 평촌마을 전경
◆허리 잘린 마을 산세
태풍이 올라온다더니 우리 고장은 영향권에서 벗어난 모양이다. 아침부터 강한 햇볕에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진안읍 오천리 평촌마을은 지난 5월에 소개했던 진안읍 죽산리 바로 옆 마을이다. 내를 따라 국도가 이어지는데, 평촌교라는 좁은 다리와 ‘평촌마을’이라고 새겨진 돌로 만든 이정표가 국도 바로 옆에 있어 찾기에 어렵지 않다.

평촌마을은 국도를 사이에 두고 ‘평촌’과 ‘석고개’로 나뉜다. 둘 다 한 마을이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주민들은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평촌’은 들판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졌고, ‘석고개’는 예전에 죽산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이름인데, 주민들이 정착하면서 마을 이름이 됐다.

▲ 석고개는 자연마을 이름이면서 죽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서는 고풍스런 평촌성당을 볼 수 있는데, 도로 바로 옆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기록에서는 ‘이 마을은 1600년경에 고씨 일파가 자리 잡아 형성됐고, 1675년에 석현이라고 불리다가, 1700년에 평지들, 1910년 평촌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적었다.
평촌과 석고개 사이에는 넓은 뜰도 펼쳐져 있어 요즘엔 벼가 익어가는 구수한 향기가 난다. 그리고 산과 가까운 밭과 벼농사를 짓던 논 일부에는 고추를 많이 심어 놓았다. 그중에는 벌써 빨갛게 익은 것도 눈에 띄었다.

평촌마을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국도 말고도 산 중턱으로 난 도로가 보인다.
평촌마을 뒷산 날등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도로는 외오천에서 시작해 봉우재를 넘어 진안읍 가막리 상가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평촌마을 앞 물봉산(무봉산舞峰山. 높이 612m) 중턱은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익산-포항간 고속도로’가 산 허리를 끊고 이어져 있다.

주민들은 “옛날부터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물봉산과 봉우재가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는데, 도로가 산허리를 끊어 경관은 물론 기(氣)가 끊어졌다.”라면서 안타까워했다.

실제 ‘진안군향토백과사전’에서는 ‘옛날 마을에서는 앞산인 물봉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마을 뒷산 날등이 가막리로 가는 길을 내면서 끊겼다. 그 이후 마을 청년들이 이유 모르게 아프거나 마을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은 마을 날등의 맥이 끊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평촌마을 경로당. 경로당이 있는 공터 한쪽에는 경로당을 지을때 땅을 기증해 준 고 한판동씨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었다.
◆주막 즐비했던 교통 중심지
평촌마을은 한때 50∼60가구가 살던 큰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규모가 작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일찌감치 평촌성당이 들어선 것(주민들은 30여 년 전쯤으로 기억했다.)과 마을에서 쌀 수매가 이뤄졌던 것(현재는 진안읍에서 수매가 이뤄져 수매창고가 비어 있다.) 등을 봤을 때는 평촌마을이 인근지역의 중심지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오천리가 장수군 천천면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특히 평촌마을에서 지금 평촌교 근처에는 주막이 여럿 있었고, 마을 구성원들이 각성바지인 것을 감안하면 사람들의 왕래가 왕성했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의 왕래가 잦고, 넓은 농지도 끼고 있는 평촌마을은 예전부터 골고루 잘 사는 마을로 통했다.
지금은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줄고, 노인이 많은데다 농업이 쇠락하고 있어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지만, 도로를 끼고 있고 진안읍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생활하기에 불편하지는 않다. 시내버스도 하루 여섯 번 이상 정차한다.
 
◆해방되면서 심은 정자나무
평촌마을에는 그늘을 넓게 드리운 정자나무가 있다. 마을 입구에 있어 액막이 구실을 하는 나무다.
“해방되면서 일본에 끌려갔던 젊은이들이 돌아와서 조그만 나무를 심었는데, 그게 커서 지금은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가 됐어요.”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정동수(76)씨가 정자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평촌에서는 음력 7월 백중에 정자나무에 제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옛날에는 풍물을 곁들인 마을 잔치였는데, 요즘은 고기 등 먹을거리를 장만해 절을 올리는 것으로 간소화했단다.

▲ 오천초등학교에 다니는 은주(이은주)와 이웃집 할아버지 송재홍씨가 정자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우리 마을이 주민이 많고 골고루 평안하게 잘 살던 곳이어서, 절기마다 잔치를 자주 열었어요. 대보름에는 달집태우기도 하고, 더 옛날에는 추석 때마다 씨름대회도 열고 그랬어요.”
정동수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정자나무 밑으로 가 보니 송재홍(82)씨와 문광준(68)씨, 그리고 오천초등학교에 다니는 은주(이은주, 9세, 2학년)가 빈대떡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자 송재홍씨가 빈대떡 맛이나 보라며 붙잡았다.
 
◆고추 풍년이면 걱정 커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요즘 평촌마을의 걱정거리는 바로 고추값이었다. 예년에 비해 올해는 날씨가 좋고 병충해도 적어 풍작이 예상되는데, 언론에서는 벌써 고추값 하락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광준씨는 “옛날에 쌀금(수매가격)이 좋을 때는 걱정 없이 먹고 살만 했는데, 지금은 농약값하고 농기계 이용료를 대기도 힘들다.”라면서 “요즘 마을에서는 벼농사를 포기하고 고추를 많이 심었는데, 전국적으로 생산량이 많아 가격이 많이 내려갈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또 송재홍씨 역시 “마을 사람들이 평균 500평(1652.9㎡) 정도 농사를 짓는데, 약이라도 한 번 치려면 50∼60만 원이 들어간다.”라면서 “600g에 7천∼8천 원 정도만 받을 수 있으면 좋은데, 올해는 절반을 받기도 힘들 것 같다.”라고 걱정했다.

문광준씨가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 나이가 60대인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을 거예요.”

▲ 정동수씨
 인터뷰 … 평촌마을 토박이 정 동 수 씨

 평촌마을의 과거와 현재에 관해 물어볼 사람을 찾다가 정동수(76)씨를 만났다. 정동수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일단 햇볕이나 피하게 우리 집으로 가요.”

집에 도착한 후 정동수씨는 마을의 역사와 지형, 인심, 전통 등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옛 이야기를 하는 정동수씨는 당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지 어딘가를 흐릿하게 응시했다.
“다른 마을을 봐도 그렇고 마을 이름에 ‘평’자가 들어가면 골고루 다 잘 사는 것 같아요. 우리 마을도 그렇고, 저 아랫마을 ‘종평(진안읍 물곡리 종평마을)’도 그렇고요.”

이야기를 이어가던 정동수씨가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 하나는 도청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승진이 빠르고, 딸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교사로 발령받았단다. 자녀가 모두 크면서 속 한 번 썩인 적 없었고 공부도 곧잘 했는데, 모두 알아서 제 길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정동수씨는 그게 ‘큰 복’이라고 했다.

자녀 모두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좋은 모양이라고 얘기하자 정동수씨가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6.25(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휴전이 되고 나서 군대에서 글하고 숫자를 깨우쳤어요. 입대하기 전에 형님한테 받침이 들어가는 글자를 배우려던 차에 입대를 했었는데, 아직 글자를 완전히 깨우치지 않아서 집에 편지도 못 쓰고 그랬어요.”

그런 정동수씨는 어떻게 ‘문무교육대’에 배치돼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3개월 만에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뗐고, 산수 공부도 열심히 했다. 이런 정동수씨의 노력에 당시 장교들이 감동 받아 더 신경을 썼다고 한다. 

요즘엔 자녀 모두 “제발 일 그만 하시고 편안하게 지내시라.”라면서 매달 용돈을 건넨다고 한다. 하지만, 정동수씨는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돼 농사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일하는 게 재미있어요. 쉬면 몸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할 일을 해야 하거든.”

정동수씨의 집 외양간에는 황소 두 마리가 있다. 한 마리는 어미이고, 몸집이 작은 소는 새끼다. 정씨는 요즘에도 어미 소에 쟁기를 물려 밭을 갈고 있다.
“아무리 기계가 좋아도 기계가 못 들어가는 곳이 있거든요. 그때는 소를 끌고 쟁기질하는 게 제일 좋아요.”

일이 많고 바쁜 봄 농사철에도 정동수씨는 이웃에 혼자 사는 노인들이 부탁하면 소를 끌고 가서 논밭을 갈아준다고 했다. 이런 정동수씨의 모습이 곧 평촌리의 인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경로당이 있는 공터 한쪽에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현황판'이 빛바랜 채로 걸려 있었다. 이곳에는 마을의 사업실적과 목표 등이 적혀 있다.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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