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이야기(21) 부귀면 궁항리(2)…상궁ㆍ중궁

▲ 부귀면 궁항리
운장산 줄기가 뻗어 있는 궁항리는 참 평화롭게 보인다. 보기 좋은 산세를 둘레에 두고 자연마을 몇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주민들은 마음씨가 고와 지나가는 낯선 사람도 살갑게 대해준다. 부귀면 가장자리에 있는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하지만, 궁항리 사람들은 너무나 아픈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이웃과 가족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그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은 평화롭고 살기 좋았던 이 마을에 치유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인심이 좋다. 당시의 아픈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있지만, 그들에게 삶은 남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 역시 그렇다.

최근 이 마을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이 떠나던 마을에서 사람이 찾아 들어오는 마을로 바뀌고 있다. 빈집이 즐비했던 마을엔 하나 둘 새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새집으로 이사 온 사람들은 마을 원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푸근한 인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찾은 상궁과 중궁마을. 오랜 전쟁의 아픔에도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 부귀면 궁항리
◆대문 구실 하는 마을 숲
궁항리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신궁, 하궁마을을 지나 다리 하나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나무 여러 그루를 심어놓은 숲이 보인다. 숲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 마을의 대문 같은 구실을 한다. 이곳은 중궁마을이다.

그리고 그 숲 한가운데에는 크지 않은 비석이 있다. ‘충의비’라는 이름의 이 비석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살해된 마을 주민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매년 마을에서는 제를 올려 이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또 숲 한쪽에는 집을 부순 흔적이 있다. 얼마 전 타지 사람이 비어 있던 그 집을 사들여 부쉈는데, 그곳에 새집을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도로 왼쪽으로 주택이 밀집한 마을이 보인다. 열 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짓고 있는 집도 보였다. 이 마을은 궁항리에서도 잘 살던 마을로 꼽혔다고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떠나 지금은 작은 농촌마을로 남았다.
  
◆저수지 아래 조용한 마을
중궁마을을 지나 벼가 익어가는 넓은 뜰을 지나면 상궁마을이 나온다. 도로 오른쪽으로 낡은 집이 여러 채 모여 있는데, 빈집도 꽤 된다.
각 집에는 곶감을 걸어 말리는 건조장이 갖춰 있는데, 몇몇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파손되고 기운 것들도 보였다.
상궁마을 뒤는 비교적 큰 규모의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잦은 비에 물이 많이 불었는지, 검푸른 빛이 꽤 깊어 보인다.
  

▲ 부귀면 궁항리
◆상궁에서 만난 새 주민
일단 상궁마을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마을 곳곳을 돌아봤다. 그러다 마을 맨 위에서 굴착기가 작업중인 집에 가 보았다. 안에서 중년 여성 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정정희(53), 정란희(49)씨 자매다. 이 집은 전에 전주에 있는 한 대학교의 교수가 살던 곳인데, 대학교수가 외국에 나가면서 정정희씨가 구입했다고 한다.

“전주 인근지역을 돌아봐도 우리 마을 같은 곳이 없어요. 자동차로 전주까지 20분밖에 안 걸려 출퇴근할 수 있고, 주변 환경이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아 참 깨끗해요. 운장산 줄기가 참 보기 좋고요.”

사실 정정희씨가 이 마을로 이사 온 것은 몇 해가 된다. 마을 아래쪽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는데,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주변풍경에 반해 아예 눌러 살기로 한 것이다. 남편 직장이 전주시인데, 거리가 가까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후덕한 인심에, 우리 고장에서 진행하고 있는 각종 주민 대상 프로그램에 참석해 공부하는 재미도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하게 된 배경이다. 정씨는 이 마을을 ‘천국’이라고 말했다.

“제 동생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몸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집에 머물면서 요양하라고 제가 불렀어요.”
눈매가 닮은 자매의 모습은 매우 다정해 보였다. 아름답고 청정한 환경에서 서로 챙겨주며 지내면서 더 친해진 모양이다.

“우리 마을에는 계속 도시에서 살던 분들이 이사 오고 있어요. 전주에서 교직에 계신 분들이 많고, 직장에서 퇴직을 앞둔 분들이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기 위해 이사 오신다고 해요.”
그 덕에 상궁마을은 새 주민들이 늘고 있다. 사람이 떠나던 마을은 이제 사람이 찾아오는 마을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엔 새로운 기운이 움트는 것 같은 기운이 감돈다.
  

▲ 인민군의 양민학살이 있던 당시 뒤에 보이는 집앞 마당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 있었다는 유순임씨. 그런 아픈 기억이 있는 마을이지만, 이 곳이 좋아 자녀들의 만류에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이웃과 가족 죽어갔던 전쟁
상궁마을을 둘러보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집 마루에 노인 세 명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묻기 위함이었다.

“내가 스물두세 살 때였어. 인민군들이 많이 왔는데, 정수암 너머 검터라는 곳에 머물면서 저녁만 되면 마을로 내려와서 약탈을 일삼았어. 그러더니 사람들을 데리고 가더니 모두 죽여버렸어. 그때 우리 바깥양반도 죽었어.”
안순자(79)씨의 얘기였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기억이지만, 안씨에게 그 기억은 고통과 함께 굳어져 가슴 깊이 박혀버린 듯이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다.

“중궁 탑거리에서 우리 친정오빠가 죽다가 살아났어. 저녁에 마을 청년 한 명하고 같이 총을 메고 탑거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숲에 숨어있던 인민군이 총을 쏴서 그 청년을 죽인 거야. 그래서 우리 오빠는 얼른 논두렁 뒤로 숨어서 꼼짝 않고 숨어있었는데, 인민군들이 계속 주변을 수색하며 오빠를 찾더래. 오빠는 기왕 죽을 거 한 놈이라도 죽여야겠다고 생각해 고개를 살짝 내밀었는데, 인민군들은 멀리 떨어져서 오빠를 찾더라는 거야. 그래서 밤새 논두렁 뒤에 엎드려 있으면서 목숨을 구했어. 그리고 일흔두 살까지 살다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

안순자씨가 다시 옛날 기억을 더듬었다.
“저녁만 되면 인민군들 밥을 해줘야 했거든. 혹시라도 대문을 걸어두면 마구 흔들어대면서 집주인을 불러냈어. 당시 인민군들 얼굴이 분명하게 기억나는데, 말투만 다르지 우리하고 똑같아. 인민군이 몇 번을 우리 동네로 내려왔는데, 처음은 그냥 밥만 먹고 식량 챙겨서 가더니, 그 다음에 온 인민군들이 그렇게 난리를 친 거야.”
  

▲ 부귀면 궁항리
◆땅굴에서 숨어지낸 한 달
상궁마을을 나와 중궁마을로 나왔다. 도로 옆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고 있던 유순임(76)씨를 만났다.
“그날 면소재지에서 방위훈련(민방위 훈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을 받았어. 그리고 밤에 인민군들이 나타나서 일을 벌인 거야. 우리 집 식구들은 마당에 땅굴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한 달을 숨어 지냈어. 얼마 뒤에는 이모네 식구들까지 우리 집으로 피난 와서 함께 지냈어. 그 덕에 우리 집 식구들은 무사했는데, 당숙만 돌아가셨지.”

옛날 참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유순임씨는 “아이고”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이 마을을 못 떠나겠어. 여기가 참 좋아. 아들이 자꾸 도시 나가서 살자는데, 아파트에 있으면 옥살이하는 것 같고 답답해서 못 있겠어. 그래서 이렇게 혼자 지내고 있어.”

중궁마을 역시 타지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집터 몇 곳이 타지 사람들한테 팔렸고, 구입하려는 사람들도 줄을 섰단다. 그런데 땅주인들이 더는 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땅값이 많이 올랐는데,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분위기인 모양이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서 집 수리도 안 하고 그냥그냥 지냈는데, 집을 새로 지을 걸 그랬어. 우리 손자들이 오면 하루만 더 있자면서 보채거든.”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졌다. 피붙이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찾아오는 마을 상궁·중궁
상궁과 중궁마을 모두 사람이 들어오는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온 새 주민들은 마을의 모습이 지금 그대로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금처럼 푸근한 인심이 가득하고, 지금처럼 아름답고 청정한 주변 풍경이 그대로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 주민들은 넓은 도로와 고층아파트, 많은 자동차가 있는 공기 탁한 도시를 피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다.
이러한 마을의 변화에 어울려, 현재 마을에서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 깻잎 농사 등이 활성화된다면 이 마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란 확신 섞인 기대가 생겼다.

▲ 충의비

한국전쟁 때였다. 1950년 9월15일 연합군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던 인민군은 보급로는 물론 퇴각로까지 막히자 뿔뿔이 흩어진 채 밤에 산길을 따라 퇴각했다.

당시 우리 고장에는 소수 경찰 말고는 정규군이 없었다. 대부분 마을 청년들이 약간의 군사교육을 받아 스스로 총을 메고 마을을 지켰다.
운장산 줄기는 당시 인민군의 퇴각로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운장산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늘어선 우리 고장 몇몇 마을에서 인민군(공비)과 교전했다는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궁항리는 가장 큰 양민 피해가 발생했던 곳 가운데 하나다.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수차례에 걸쳐 궁항리, 그 가운데에서도 정수암, 상궁, 중궁마을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당시 주민들은 인민군들이 무서워 그들의 요구에 따라 밥을 지어주고, 쌀을 비롯한 식량을 주었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 떨고 있던 주민에게 피바람이 불었던 것은 1951년 4월10일, 음력으로 3월 초닷새였다.

새벽 4시에 산에서 내려온 인민군(기록에는 ‘공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은 군복을 갖춰 입은 정규군이라고 기억했다.)은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했다.

그리고 인민군은 검터(정수암에서 더 올라간 운장산 중턱)에 머물며 마을 주민들로 하여금 쌀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다 인민군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 정수암 쪽으로 데려간 뒤 한 데 모아놓고 소총을 난사했다. 기록에는 이때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0여 명이라고 전하지만, 주민들은 2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인민군은 마을 곳곳에 불을 놓았고, 마을엔 까만 재만 남았다.

이런 전쟁의 상처를 주민들은 1977년 11월에 충의비를 세워 기록했다. 비석 뒷면에는 신원이 확인된 당시 희생자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새겨놓았다. 그리고 매년 음력 3월 초닷새, 인민군이 양민을 학살한 그날 주민들은 이 비석에서 제를 올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 부귀면 궁항리

▲ 마을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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