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그대 사랑 책갈피에..."(40)

▲ 지음: 정혜신, 김동관, 한홍구, 박노자, 김두식, 김형덕, 정희진, 플라이 버드와이 출판: 한겨레
역사는 어쩌면 거짓말의 탑일 수도 있다. 과학은 어쩌면 오류의 돌무더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진실은 무지의 구덩이일 수도 있다. 의심하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영혼을 담고 있는 자일지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그리고 목차를 펼치면서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다시 고개 드는 의심들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자신이 임상적 대상으로 관찰한 인간군에 대해서 말한다.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명제 앞에서 우리는 먼저 관계성을 도입해 이해하려 한다. 정혜신은 남자를 중심으로 남녀관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가 말하는 남자들의 임상심리를 따라가 보면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 이미 공식화되어 있다.

아내를 두고 여러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이는 남자들은 한 애인과 통화를 하고나면 다른 여자들과도 연달아 통화를 하는 공통된 행동양식을 보이는데 이것은 무의식적인 죄의식이 일으키는 심리적 현상으로 거꾸로 이용하면 외도하는 사람을 잡아낼 수 있는 확률이 크다.

백 년 전 프로이드가 말한 ‘비밀이라는 것은 몸에서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감출 수 없다’ 는 말은 그의 임상 대상이 된 남자들에게서 흘러 나온다.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려면 유형이나, 혈액형을 들어 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학문적인 유용함이 부른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폭력이 되는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사람은 관계에 따라 늘 바뀌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

보수주의자란 확고한 신념의 행동이 아니라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평등에 대해 독선적인 혐오감과 공격성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일종의 노이로제증상일 뿐이다.

모호한 것을 못 참아 친숙한 것에 매달리고 고정관념에 강화되어 버리는 현상으로 히틀러나 무솔리니, 레이건과 부시같은 사람들. 모호함을 견디기 힘들어 하면 파쇼가 된다. 모호함을 견디는 건 느림을 견디는 것과도 통하지 않을까.

사람의 거짓말의 근본코드는 바로 ‘나르시즘’ 인데 나르시즘 증상을 가진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일상적인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거짓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워 할 참혹한 사건을 이용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그 사람의 희생양이 되기가 쉬운데 뜻밖에도 그런 사람은 통상적으로 지극히 모범적이고 깔끔한 사람일 수 있다하니 인간은 애매모호함이라는 전제를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사를 논하다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고개- 좌파와 우파,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며 한계레임을 의심해 본 사람이 있을까. 한홍구와 박노자는 그런 의심을 당연하게 권해온다. 한,중,일은 지구촌앞마당에서 펼치는 한판 굿으로, 단군설화의 출발점도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홍익인간의 구현아래 단군의 자손으로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설은 절대 조선시대에는 용납되지 않을 민족설화였다.

일제가 민족개조론으로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위기를 느낀 신채호와 박은식은 일본서기에 대항해 단군설화를 만들었다. 그런 배경으로 일본서기의 구조와 많이 닮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군국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설화인지라 힘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특징을 보인다.

우리가 일본총리의 신사참배를 비난하고 항의하지만 베트남 쪽에서 보는 우리의 국립묘지 참배도 같은 모습이 아닐 것인가 하는 논리는 우리가 믿어온 역사라는 것이 살아남기 위한 혹은 힘을 잡은 어떤 한쪽의 변을 수용해 온 것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 않은가.

김두식교수의 거짓말 권하는 사회에서 비로소 알 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
한 때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티비를 열심히 시청한 적이 있었다. ‘국회청문회’ 라고 하는 미국을 흉내 낸 생소한 광경에 한 가닥 시원한 소낙비 소리나 들을까 하여.

그런데 우리 귀에 들린 건‘ 기억이 안 난다’ 거나 ‘기억이 없다’ 하는 대답이 약속이나 한 듯 들렸고 그 말은 오래 동안 유행어가 되었다
그 때 내가 한 의심은 왜 모른다거나 아니다 가 아니고 기억이 없다였을까 였다, 그랬는데 그의 형법 152조의 위증죄를 들으면서 비로소 알았다.

위증죄란 우리가 알고 있듯 ‘사실과 다른 얘기’ 가 아니라 ‘자기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이 위증’ 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른 얘기를 했다고 해서 위증죄가 되는 게 아니라 사실에 딱 맞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했다면 그게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위증죄로 처벌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기억을 증명해줄 자가 자기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위증죄란 있을 수 없는 죄가 되지 않겠는가? 나의 의심은 오늘 밤 정말 쓸데없는 곳을 향하여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 같다

저작권자 © 진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