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선진의 "그대 사랑 책갈피에..."(41)

▲ 지음: 정혜신, 김동관, 한홍구, 박노자, 김두식, 김형덕, 정희진, 플라이 버드와이 출판: 한겨레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공장에서 새로운 부품을 만들듯 만들어 질 것 같던 인간장기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망상을 가지게 했던 황우석사태의 피해자들이다. 국가의 자존심과 도덕적 잣대까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그 사태는 아직도 이야기 할 것들이 많다.

거짓과 조작으로 드러난 사건을 두고도 많은 이들은 대놓고 돌을 던지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희망을 스스로가 부숴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그런 사태를 두고 외국에서 놀란 것은 어떻게 그 많은 난자를 실험용으로 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기술을 앞에 내세우며 이 나라에서 연구를 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그런 외국인들의 시각이 우리에겐 다소 이질적으로도 보인다. 조그만 난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것으로 혜택을 받는 환자가 더 중요하냐는 물음. 조그만 도룡뇽이 더 중요하냐, 천성산 터널이 더 중요하냐는 물음으로 우회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나라. 우리에겐 생각의 유기적 고리가 익숙하지 않다.

과학은 이제 신의 자리에 올라 있지만 사실 과학계도 사기와 거짓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과학은 과학이기 전에 사회과학으로써 지켜야 할 도덕적 원칙을 중시해야 함을 김동광은 말한다.
생각하기도 싫은 황우석 사태, 마음여린 사람들을 광기로 끌고 간 거짓 종교의 다른 모습이 아닌가 싶은 그 사건에 우리 모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오래도록 성찰해야 한다.

하루라도 말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쓰는 말에 얼마나 폭력과 차별이 들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말은 의사소통을 위하여 먼저 익히고 배워야 하는 일종의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남자의 거짓말과 권력 관계라는 주제로 입을 여는 여성학자 정희진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눈을 뜬다.
기존의 언어나 인식체계가 남성이 살아온 경험을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남성의 삶과 입장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집이라는 곳은 남성에게는 ‘쉬는’ 장소지만, 여성에겐 ‘일하는’ 곳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 우리들은 집을 휴식의 이미지로 고정시켜 갖고 있다. 이처럼 남성의 삶은 언어와 일치하지만 여성에게는 불일치다.

낙태를 반대하던 원인 중의 하나가 정자가 아깝게 버려진다는 생각이 차지했던 시대도 있었고, 지구의 반이 여자라는 점을 자주 강조해야 하는 현대도 의식의 완전한 변태는 아직 머나먼 여정이다.
성별은 사회를 조직하는 기본원리이고, 성차별은 모든 지배- 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한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여성주의는 기존의 서구남성이 갖고 있는 모순과 딜레마를 돌파하는 사유방식이기 때문에 자기 성장과 사회변화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학문이다.

그런데도 여성학 하면 우리는 밥을 짓고 옷을 만들고 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같은 언어도 누가 정의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힘을 가진 자가 말하는 배려와 배려를 받는 자의 배려는 같을 수가 없다.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성폭력을 놓고도 말의 의미는 다르다. 남자들은 절대 폭력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진실일 수 있다. 남성을 자극한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까놓고 말해 성폭력 사건의 조사를 받을 때 ‘삽입이 되었나요?’ 하는 물음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흡입이 되었나요?’ 라고. 그냥 웃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현상이다.

그녀는 말한다
“ 가정폭력으로 가정이 깨져서 문제” 가 아니고 “ 웬만한 폭력으로도 가정이 깨지지 않아서 문제라고” 정말 그렇지 않은가?

오늘 뉴스에 18세 소녀가 인터넷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되었는데 중요한 원인이 소녀의 오빠가 사업초기에 기본구축을 인도에서 했기 때문이라는 보도를 들었다. 인도- 어머니의 강 갠지스의 붉은 석양이 떠오르는 영적의 땅에 IT 강국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핵보유국인 강대국으로 떠오른다. 나는 영혼과 IT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했다.

전해 듣는 이야기와 책에서 얻은 정보가 인도를 더욱 신비스러운 나라로 받아드리게 했다. 가난하지만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나라.
그러나 인도도 빠질 수없는 21세기에 바꿔야 할 거짓말의 하나이다.

평화운동가인 인도인 프라풀 버드와이는 이렇게 인도를 비추는 거울을 깬다.
세계적 IT강국이 되었으나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지고 국민전체의 수입은 더 낮아진 인도.
내세를 믿는 종교와 영적인 땅으로 비치는 그곳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구루와 현자들의 거짓 이미지. 가난한 불가촉천민이 오로지 달라질 내세를 바라고 바치는 헌금으로 지어지는 크나큰 사원과 뒤로 특권층과 손잡고 있는 구루들.

가장 크고 화려한 사원은 인도가 아닌 뉴욕근처에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늘어나는 비정규직 일자리, 위축되는 노동조합, 심화되는 빈부 격차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언설을 거짓으로 뒤집어 돌려보는 사유를 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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